목 베인 피가 냇물을 이뤄 흐르다 멈춰 끝난 곳 ‘피끝마을’
목 베인 피가 냇물을 이뤄 흐르다 멈춰 끝난 곳 ‘피끝마을’
  • 김세동기자
  • 등록일 2020.11.25 20:06
  • 게재일 2020.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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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피끝마을→금성대군→단종과 조선500년 역사속으로
피끝마을 전경.

조선 500년, 가장 애틋한 아픔이 서린 우리 역사의 흔적이 영주시에 남아 있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실패로 이어진 대학살로 피로 물든 강줄기의 끝자락이라는 이름의 피끝마을.

단종복위 1차 실패로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영주)로 위리 안치 됐던 곳.

단종복위 실패로 죽음을 맞이한 금성대군의 충절을 받들어 신격화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레마을 성황제가 열리고 있다.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은 권력의 화신인가, 왕권 강화를 위한 결단이었나. 순흥은 역모의 땅인가, 충절의 고장인가를 두고 현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이어지고 있다.
 

단종 복위 실패로 죽음 맞이한 금성대군 위리 안치 됐던 곳
세조, 철기병 출동시켜 순흥 근방 30리 백성 무참히 학살
‘경(敬)자 바위’ 주세붕이 밤마다 우는 원혼 달래려 세겨 ‘유래’
황소 잡아 즉석 제물·새옹 밥짓는 방법 등 특별한 의식
금성대군 모신 ‘두레골 성황제’ 무형문화재 등재 한목소리

◎ 피끝마을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의 다른 이름이며 조선 시대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이 있다.

마을 이름은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세조의 측근인 한명회와 6촌간인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인근 백성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당시 도호부였던 순흥은 황폐화되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전해진다.

(정축지변) 당시 순흥과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284호에 1천679명이 살았지만, 단종복위 사건으로 300여명의 백성들이 희생 됐을 것으로 현재 역사가들은 추론하고 있다. 단종애사의 묘사에 따르면 순흥 청다리 아래 목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며, 때문에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순흥에 본적을 두고 있던 순흥 안씨는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해진다. 단종복위 사건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순흥 안씨는 평민으로 추락하고 대부분 순흥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금성단.
금성단.

◎ 순흥도호부 (지금의 순흥면)

순흥은 역모의 땅이라 해 온갖 차별을 받게 되고 당시 도호부였을 만큼 컸던 순흥은 이 사건을 계기로 폐부가 되고 행정 구역은 각각 영천(榮川), 풍기, 봉화로 나뉘어져 통합 되게 된다.

순흥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이들을 달래고자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경자바위’의 유래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이야순(1755년 ~ 1831년)의 글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경자 바위는 소수서원 내 죽계천변에 현존하고 있다.

금성대군 역시 이때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왕실 족보인 종적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

이때 연루된 인물들은 영조 14년에 이르러 복권된다. 그리고 영조 18년 금성대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한 금성단이 순흥에 세워진다.

현재도 지역 주민들이 어린이들을 놀릴 때 ‘순흥의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흔히 전해지는 것처럼 방탕한 유생들의 사생아들을 이 다리에 버려 키운 것이 아니라, 정축지변 당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버려졌다가 키워진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성대군을 신으로 모시는 두레골 성황제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는 모습.
금성대군을 신으로 모시는 두레골 성황제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는 모습.

◎ 금성대군은 어떤 인물인가

이름은 유(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졌다.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갖자, 형의 행동에 반대하다 1455년 단종 3년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고, 다시 광주로 옮겨졌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돼 경상도 순흥(영주)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하고 현재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인근에 있다.

금성대군 혈석을 모신 두레골 서낭당은 영주시 단산면 단곡3리 소백산 국망봉 동편 기슭에 있다.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쓴 경자바위.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쓴 경자바위.

◎ 금성대군을 모신 두레골 성황제

조선 후기 때 순흥고을에 사는 이선달이란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묻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 주었다.

이선달은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동 냇물을 뒤져 돌을 발견하고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된다.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정성을 모으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

구한말에 이르러 왜군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고 서낭당에 침을 뱉는 등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 무렵 어느 주민의 꿈에 금성대군이 또 나타나 “죽동 서낭당은 있을 곳이 못되니 청결한 자리로 옮겨달라”고 일렀다.

이로인해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에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초군청이었다.

두레골 성황당이 특이한 것은 접시에 참기름을 붓고 심지를 넣어 만든 성화(聖火)로 사당을 밝히는 것과 황소를 잡아 즉석 제물로 올린다는 것, 엄동설한에도 제관들이 계곡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하는 것, 옛 나무꾼들이 새옹에 밥 짓는 방법으로 장작불에 밥을 지어 새앙을 올린다는 것 등이 있다.

순흥초군청은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두레골 성황제는 무형문화재로 등재 돼야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한다며 현재까지 내려오는 순흥초군청 관계자들과 지역민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금성대군이 유배 됐던 순흥 위리 안치지.
금성대군이 유배 됐던 순흥 위리 안치지.

◎ 단종 그는 누구인가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다.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됐다.

1452년 5월,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2세였다.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고 1454년 1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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