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 등록일 2020.11.03 18:21
  • 게재일 20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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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옮겨지은 관동팔경의 월송정
1980년 옮겨지은 월송정.

관동(關東)이란 지명은 우리에게 푸른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하게 하지만 1923년 대지진으로 무고한 조선인이 살해당한 관동대지진과 일제강점기 때 만주의 악명 높은 관동군이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은 관토 지방을 관동이라 하고, 중국의 관동은 낙양 동쪽 하남성과 산동성을 일컫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산해관 동쪽 만주(동북)지역을 일컫는다.

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편성할 때 서울, 경기를 관내라 하고, 북쪽을 관북, 동쪽을 관동이라 했고, 좁은 의미로 대관령의 동쪽이니 오늘날 강원도의 영역이다. 울진이 옛 강원도에 속해 월송정과 망양정도 관동팔경이라 한 것이다.

#. 관동팔경의 최남단 월송정

관동 8경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정자가 울진군 월송정이다. 이 월송정도 지금 위치보다 450m 아래에 있었는데 홍수로 몇 번이나 유실되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지었던 것이다. 울진의 남쪽 끝 기성에 접어들어 옛 국도 변에 월송정을 알리는 큰 대문이 웅장하게 서있다. 곧이어 평해 황씨 종택과 시제단이 나오고 좌우 솔밭의 호위를 받으며 헤집고 가면 끝자락에 양촌 권근(1352~1409년)의 ‘소를 타는 즐거움’의 글을 새겨놓았다. 권근은 목은 이색의 수제자로 여말선초의 학자로 유머러스 하면서 달관한 경지의 글을 필자는 익히 보아 왔든 터라 더욱 반가웠다. 그 옆에는 달밤에 소를 타고 산수를 즐기는 기우자 이행(1352~1432)의 행적과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그린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를 새겨 놓았다. 여기를 그의 호를 따 ‘기우자의 길’로 명명했다.
 

일본 승려 석수윤이 그린 ‘월하기우도’.
일본 승려 석수윤이 그린 ‘월하기우도’.

기우자 이행이 누구인가?

이름과 자, 호가 예사롭지 않다. 이행(李行) 이름과 자 주도(周道·여러 길을 두루 다닌다)’만 보아도 평생 나그네이고 호 기우자(騎牛子)는 ‘소를 타는 사람’이니 진정한 나그네이지 않은가? 여말, 선초의 학자로 그가 단순히 소 타고 술동이 싣고 음풍농월이나 했다면 그냥 낭만적이라 별 의미가 없지만, 국가를 위하여 크나큰 일과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도 직필로 자신의 명분과 가치관대로 살았기에 그 낭만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제주도(탐라국)가 우리나라에 편입되는 큰 역할을 한다. 1386년(우왕 13년)에 탐라국으로 건너가 탐라국 성주 고신걸을 설득하여 그 아들을 고려로 데리고 와 그때부터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고려 땅이 되었다.

개경에 살던 이행이 열 살 때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외가(평해 황씨)인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17살에 생원시, 20살에 문과 급제할 때 시험관이던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제자가 되는데 같은 나이에 이색의 최고 수제자인 권근과 절친이라 권근이 기우설(騎牛說·소를 타는 즐거움)이란 낭만이 흐르는 명문장을 남긴다.

“나도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은 근심 걱정이 없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라서 자주 즐기지는 못한다. 평해에 사는 나의 벗 이주도(李周道)는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달 밝은 밤이면 가금씩 소 잔 등에 술동이를 싣고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사물을 볼 때 빨리 보게 되면 거칠어지고 천천히 보면 그 묘미를 다 얻을 수 있는데, 말은 빠르고 소는 느리므로 소를 타서 느리게 가고자 한 것이다.…. 세상만사를 뜬 구름 같이 여기고 맑은 저녁 바람에 휘파람을 불며 유유자적하여 고삐를 잡고 소 가는대로 내버려둔 채 마음껏 술을 따라 마시면 가슴이 유연해져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 있는 것이다.….” 이 글도 권근이 20대에 쓴 것이니 이행도 이미 20대에 소 타고 달밤을 노니는 대 낭만의 자유인이었다. 후반기의 삶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지만 강직하여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이색의 제자 중에 두 부류가 있다. 정도전 권근 같이 이성계의 조선개국 참여파와 정몽주, 이행 같이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는 두 부류가 생긴다. 이행은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말의 사관들은 뒤가 두려워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관한 사실을 거짓을 섞어 적당히 쓰자 춘추관 학사로 있던 이행은 태조가 죄도 없는 우왕 창왕, 변안렬 등을 죽였다고 직필했고, 정몽주를 죽인 조영규를 만고역적이라고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이유로 태조 2년(1593년)에 조영규의 탄핵으로 이곳으로 귀양 오는 묘한 인연의 땅이다. 그 뒤 태조와 태종이 벼슬길을 종용했으나 스승 이색과 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자기와 처지가 다르니 출사(出仕)할 것을 권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월송정 주차장 입구에는 경기체가로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은 안축(1287~1348년·순흥 안씨 호 근재)의 유허비가 길옆에 세워져 있다. 월송정 입구에 솔밭이 나그네를 맞이하는데 예전보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 조금 볼만했지만 멋있고 울창한 솔밭을 보려면 50년, 100년 후에 후세들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56년에 심은 월송정 주위의 솔 숲.
1956년에 심은 월송정 주위의 솔 숲.

#.월송정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

솔밭 사이를 걸어 아무도 없는 월송정에 올랐다. 눈앞에는 여인의 살결보다 더 고운 하얀 백사장과 푸르다 못해 시린 물빛의 푸른 동해바다가 파란하늘과 격정의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월송정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존무사 박숙이 처음 지었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핵심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 때 중건했다. 퇴락한 건물을 1933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말기에 미군폭격기의 목표가 된다 하여 일본해군이 헐어버린다. 해방 후 1969년 재일교포들이 철근콘크리트로 전망대식 현대건물을 지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다고 헐어버렸다. 지금의 월송정 건물은 1980년 7월에 지은 것이다. 현판에 최규하 전 대통령의 범생이체 글씨가 있는 것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의 서슬퍼런 시절 잠시 임시 대통령 했기 때문이다. 월송정은 충북괴산, 경남 고성, 대구, 청송 등 전국에 많이 있지만, 이중 울진의 월송정이 단연 스타 정자다. 그것은 바닷가의 장소와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감회어린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월송정은 고려시대 처음 세울 때는 달구경 하고 감회어린 시를 짓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망루 역할로 지었다. 그러나 사람은 전쟁 중에도 사랑이 피고 독서하고 시를 짓듯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월송정을 노래한 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숙종의 어제시. 안축의 시, 그리고 이행의 시 등이 걸려있다.

이행은 ‘평해 월송정’시에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있네/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라 적었다. 이행이 부귀권세 물리치고 험난한 길을 걸었지만 젊을 때부터 소 타고 여유롭게 노닌 자유인이라 당시의 수명으로는 보통사람들의 두 배를 산 81살까지 살았다.

숙종의 ‘월송정’시는 “화랑들 옛 자취 어디 가서 찾을 고/ 만 그루 큰 솔들, 빽빽한 숲이라네./ 눈 앞 가득 흰 모래밭 백설인 것 같고/ 누에 올라보니 한 눈에 이는 감흥 그칠 줄을 모르겠네.”라고 노래했다. 동인의 영수였고 한음 이덕형의 장인인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여기에 귀양 와서 쓴 글을 보자.
 

월송정 누에서 바라본 푸르디 푸른 동해바다.
월송정 누에서 바라본 푸르디 푸른 동해바다.

“월송정은 군청소재지의 동쪽 6~7리에 있다. 그 이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하고, 어떤 사람은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자를 버리고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가 그 얼마랴. 그 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묵을 놀려 경물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 몰랐던 이들도 있으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을 자적하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 또한 솔을 심은 사람은 누구며, 솔을 기른 사람은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그렇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이 1738년 63세때 먼 친척 우암 최창억을 위해 그린 ‘관동명승첩’11폭 중 한 폭인 ‘월송정’ 그림을 보면 큰 소나무 빽빽하고, 월송정 아래에 건물도 몇 채 있다. 울창했던 솔숲은 일제강점기에 베어버렸고, 다시 소나무 심은 사람은 1956년 이 마을 사는 손치후라는 분이 사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만5천 그루를 심었던 것을 고맙게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화랑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수많은 문객들이 거쳐 갔지만 인근 영해에 귀양 왔다가 16년간 고생하다가 죽은 당주 박종(1735~1793년)의 ‘관동팔경’ 기행문 중 ‘월송정’을 보자.

겸재 정선이 그린 ‘월송정’.
겸재 정선이 그린 ‘월송정’.

“망양정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를 가서 솔밭 사이로 나가 바다를 가면, 강가에 화려한 정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평해의 월송정이다. 오른쪽으로는 솔숲이 산과 가지런히 울창하고 왼쪽으로는 하얀 모래가 파란 바다에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또 앞으로는 강이 들판을 가르고 흘러 한 폭의 비단 띠를 끄는 듯한데 두어 고을의 연기마저 노을인양 떠오르니 모두 한없는 정취를 자아낸다. 영랑이 놀았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랴!”

이외 수많은 사람들의 감회어린 글들이 있지만, 근처 영덕 출신 태백산 호랑이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1878~1908년)이 1904년 27살에 여기 월송정에 올라 지은, 대찬 포부의 시 한 수를 읊는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 가을바람 불어오니 감개만 솟는구나.”의 시가 저 아래 동헤의 파도치는 물결마냥 일렁인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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