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문경 조선요 김영식 대표

문경백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김영식 대표.
문경백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김영식 대표.

“군대 다녀오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가업을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연한 결정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해 오신 일이니까요.

제 아들도 지금 학교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있는데 또 그렇게 대를 이어 가겠죠.”

 

문경 하늘재 170년 된 ‘망댕이가마’ 지키며
전통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빚어내
경북 무형문화재 사기장이기도 한 그의 꿈은
오랜 연구 끝 국가무형문화재에 오르는 것
“개인의 영광 넘어 조선요가 빛나는 길 위해”

늙수그레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져 젊은 사람이 조선요 박물관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박물관 뒤로 보이는 하늘재 너머로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넓은 전시관 지붕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재는 경상도와 수도 간의 문물이 유통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생산되던 풍부한 도자 원료는 문경을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해주었다. 하늘재 아래에서 8대째 조선요의 맥을 이어가는 문경 조선요 대표 김영식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댕이가마 소장자로 경북 민속자료 135호인 망댕이사기가마를 보존하며 조선요를 만들고 있었다.

망댕이란 사람 장딴지와 같은 모양의 길이 20∼25cm의 진흙덩어리를 말한다. 이 망댕이를 촘촘히 박아 반구형의 가마칸 3∼8개를 나란히 연결한 우리나라 특유의 칸 가마를 망댕이가마라 한다. 칸마다 통풍장치인 살창구멍이 있어 불길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고 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와는 다르게 가마 안에서 불을 지피면 그릇이 더 견고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김 대표가 보존하고 있는 이 망댕이가마는 하늘재의 산허리에 있는데 여기에 가면 가마뿐만 아니라 당시 살던 집과 작업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김 대표는 여기서 나고 자라 아버지의 일을 돕곤 했는데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된 원천이라고 했다.
 

“군대 다녀오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우리집의 종손이고, 가업을 이어받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연한 결정입니다. 전 그것만 보고 자랐고,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해 오신 일이니 당연히 저도 해야죠. 제 아들도 지금 학교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있는데 또 그렇게 대를 이어 가겠죠.”

누구에게 조선요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냥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고 어릴 때부터 그 일을 도우며 자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런 대로 어릴 때 보았던 것을 기억하며 재현하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망댕이가마 오르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이 길을 김 대표의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은 지게로 도자기를 져 나르며 살았을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 길과 가마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도공들이 그런 삶 속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이 타오르지 않는 망댕이가마를 보며 선조들의 삶을 잠시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문경 조선요는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13대인 김취정으로부터 이어져 20대 김영식에까지 이른다. 3대였던 김영수가 1843년 망댕이요를 축조했고, 5대였던 김운희가 왕실자기 생산을 전담하던 경기도 분원에 발탁되어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이주해 1903년 분원의 가마를 제작했다. 이때 김운희는 백자항아리와 병 제작에 큰 명성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하재일기’ 제8권에 보면 문경사람 김비안이 1903년 망댕이가마를 축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비안은 김운희의 다른 이름으로 문경의 망댕이가마가 분원에도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운희는 가마축조기술 및 자기 성형기술이 뛰어나 광주분원에서 김문경으로 통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운희의 아들 김교수는 아버지의 분원 활동 양상을 지켜보다가 문경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끌었다. 해방 이후 도자 수공업의 명맥이 끊어져 가고 있을 때라서 김교수의 귀향은 의미가 컸다. 그로부터 문경 지역이 전통도자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교수는 조선요에서 무문의 백자 발, 대접, 잔, 항아리, 병과 같은 일상 기명(器皿)을 제작했는데 고졸한 아름다움과 정치한 세련미가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항아리, 병과 같은 중형 기명에서 고졸미와 세련미가 도드라져 조선 도자의 품격이 그대로 살아있다.

김교수의 아들 김천만은 부친의 뜻을 따라 묵묵히 조선요를 만들었다. 김천만은 특히 청화백자의 멋스러움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나아가 조선전기 분청사기의 재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식화된 포도 문양이 특징인 청화백자를 제작하여 명맥이 끊길 수도 있었던 청화백자기술을 조선요에서 지켜냈다.

김천만은 본격적으로 일본 도자기 시장에 진출하여 문경의 도자가 일본에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0년 당시 조선요에 들어와 있던 고바야시 도고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도자기의 대중화와 자연의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섬세한 제작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우수한 도자기 제작기술을 일본에 보여줄 수 있었다. 김천만이 일본으로 진출한 때에는 문경 지역 가마의 대부분이 특별한 상호가 없어 ‘호암요’ 또는 ‘관음요’라는 상호를 이용하였다. 관음요는 동네 이름을 딴 것이고, 호암요는 망댕이가마 뒤편의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지었다는데, 지금도 그 바위는 가마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김천만은 미술품은 특수한 애호가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널리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근교의 흙을 사용하고 유약은 목탄이나 장석 등의 자연 유약을 사용하며 구울 때는 소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자연 유약은 좋은 흙과 고온으로 굽는 두 가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좋은 도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매일 사용함으로써 색이 변하며 그로써 가치가 드러난다고 했다. 도자의 일상화가 시작된 것이다.

김천만의 아들이자 현재의 조선요 대표인 김영식은 8대째 170여 년간 이어온 문경 망댕이가마의 정통 계승자이다. 201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조선요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사기장이기도 한 그는 자비로 망댕이박물관을 짓고 조선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 등 국내외에 도자기 전시회를 수차례 열어 문경백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다.

“문경백자는 다른 지방 도자기와 달리 흙을 쓰는 방법이 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흙 배합률이 달라 색상에서 차이가 나죠. 저는 문경백자만의 색을 구현하려 하는데 이 노력이 인정을 받아 경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봐요. 전통방식을 그대로 계승해서 후대에 물려주고 싶어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저라도 전통을 이어받아 그대로 물려줘야죠.”

문경이 왜 도자기가 유명하냐는 뻔한 질문에 그는 당연하게도 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문경백자는 여주나 이천 등 다른 지방 백자와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문경백자는 문경에서 수십 년 전부터 만들어온 청색을 가미한 색상을 구현해 내죠. 문경 흙을 전부 사용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흙 채취 과정이라든가, 항아리를 만들 때의 점육이라든가, 열의 화도가 좀 떨어지는 면에서 차이가 있죠.”

흙이 좋으니 도자 문화가 번성했겠지만 실제로 문경 흙을 본 적은 없었다. 도자기 장인들이나 볼 수 있을 흙일 것이다.

그렇다면 8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영식 대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을 것인데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빛깔이죠. 문경 도자기는 푸른색이 약간 가미된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흰 매화에도 여러 가지 색이 있듯이 도자기도 그렇죠. 흰색이라고 모두 같은 흰색이 아닙니다. 관조백자는 회백색도 있고 설백색도 있지만 문경백자라면 뭐니뭐니 해도 청백색이죠. 제가 현재 구현해 내고 있는 것도 청백색 도자기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죠.”

젊어서 그런지 그의 꿈은 크고 조선요에 대한 열망도 가득했다.

“대통령 표창도 받고 경북 무형문화재도 됐으니 이제 문경백자의 전통 기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국가무형문화재에 올라야죠. 국가무형문화재에 오른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조선요가 인정받는 것이니까요.”

/글 천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