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 등록일 2020.07.30 19:53
  • 게재일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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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br /><br />시조시인<br /><br />
김병래

시조시인
 

바람을 쐬려고 들로 나간다. 들판을 가로질러 난 고가철로 밑에 그늘이 생겨 여름날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볏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을 본다. 가까이 개망초꽃도 흔들리고 강아지풀도 흔들린다. 풀잎들은 대부분 바람에 잘 흔들리도록 디자인이 된 것 같다.

어느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고 했지만, 태풍이나 삭풍의 경우가 아니라면 바람에 흔들린다는 것은 아픔이거나 슬픔이기보다 환희의 몸짓으로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바람이 불면 초록물결이 이는 드넓은 들판은 생명의 환희로 가득해진다.

우리 민족은 뿌리부터 바람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울 때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함께 풍백(風伯)을 가져왔다는 전설이 있고, 신라의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敎)를 베푼 근원에 대하여는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를 내포한 것으로 모든 생명과 접촉하면 이들을 감화시킨다”고 했다.

우리말에는 바람에 대한 명칭이 무척이나 많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 하늬바람, 마파람, 샛바람, 된바람, 높새바람 등이 있고 세기에 따라서는 미풍, 태풍, 폭풍 등으로 불린다. 그 밖에도 여러 경우와 상태에 따라 훈풍, 열풍, 삭풍, 돌풍, 산들바람, 소슬바람, 갈바람 등과 사회현상을 나타내는 말로 치맛바람, 춤바람, 피바람 같은 말도 있다. 풍속, 풍기, 풍경, 풍치 등 사회나 자연 환경을 나타내는 말에도 바람이 들어 있고. 요즘은 잘 안 쓰이지만 거풍(擧風)과 즐풍(櫛風)이란 말도 있다. 거풍은 원래는 쌓아두었거나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 있어 습기 찬 책이나 옷 등을 바람에 쐬어주고 햇볕에 말린다는 뜻인데 나중에 다른 의미로 변질이 되기도 했다. 햇볕 좋고 동남풍 부는 날 산 위에 올라가 상투를 풀고 햇볕과 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빗는 걸 즐풍이라 하고, 바지춤을 내려 아랫도리를 내놓고 바람에 말리는 걸 거풍이라 했다. 무더위에도 옷을 벗거나 상투를 풀지 않았던 사대부들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풍습이었다.

우리는 바람이 많은 민족이다. 바람이 불기만 하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기간에 이루고 세계 십위 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은 남다른 신바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김일성 왕조도 바람이라면 바람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자주 방향이 바뀌게 마련이다. 계절과 기상변화에 따라 풍속과 풍향이 수시로 바뀌는 게 바람이다. 인간사회에 부는 바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태풍이나 폭풍이 불 때도 있고 봄바람처럼 평온한 바람이 불 때도 있다. 촛불바람으로 오른쪽 바람이 꺾이자 그 여세를 몰아 왼쪽 바람이 광풍이 되어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에다 공영방송까지 장악하고 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다만 이제 조금씩 역풍의 조짐이 보이는 것에 희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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