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택 정신 상징하는 누마루 사랑채의 ‘충효고가(忠孝古家)’
종택 정신 상징하는 누마루 사랑채의 ‘충효고가(忠孝古家)’
  • 등록일 2020.07.28 17:03
  • 게재일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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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충과 효의 상징 간재 종택과 동호정

간재 종택 사랑채.
간재 종택 사랑채.

충과 효는 빛바랜 전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라면 최대의 단위가 국가이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가족과 사회이고 국가는 가족과 사회를 보호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원주 변씨들의 충과 효를 실천한 안동 동호정과 간재 종택을 살펴보자.

#.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과 굴불가

“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길고 길게 메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키고 찢길망정/ 임 향한 그 높은 뜻을 내 뉘라서 굽힐 소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년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앞 노래는 대은 변안렬(1334~1390)의 불굴가(不屈歌)이고 뒷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 포은 정몽주(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게 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9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 불모로 있다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고려왕이 된다. 그래서 충숙, 충혜, 충렬 등 7명의 ‘충’자가 붙는 고려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다. 공민왕(1330~1374)은 충혜왕 때 원나라로 가서(몽고 이름 백안테무르)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이 되었다. 변안렬은 중국 심양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고려로 올 때 호위해와 원주 변씨 시조가 된다. 고려에 귀화해서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운봉에서는 이성계와 왜구를 격퇴하고 위화도회군 때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함께했다.
 

간재 종택과 홍살문.
간재 종택과 홍살문.

변안렬은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개혁은 찬성했으나 왕조를 무너뜨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본 이방원(태종)의 노래에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을 정몽주는 직설적 은유의 표현이라면 변안렬은 구체적 언어로 표출했던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은 사위가 되어 이성계와는 친사돈이 되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최영의 생질 김저(?~1389)는 여주에 폐위되어있던 우왕으로부터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고 곽충보와 팔관회 참석 날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27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때 변안렬도 연관되어 처형당한다.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사위 이방번이 슬픔의 제문을 짓는다. 이성계도 변안렬을 죽이기는 했으나 뒤에 사면하고 자손들에게는 벼슬을 준다. 조선 건국 뒤 변안렬의 아들 변이는 도총제, 손자 변상복은 정종의 부마, 변상복의 조카 변효순은 태종의 부마가 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고려의 삼은(三隱)에, 대은 변안렬과 도은 이숭인을 포함하여 고려에 충성한 오은(五隱)으로 불린다. 변안렬의 충절은 정몽주에 뒤지지 않으나 역사에 크게 빛나지 않은 것은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무인기질은 남호 변협(1528~1590)과 변양걸(1546~1610)이 이어받았는지 변협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고 을미왜변 때 왜구를 격파하여 장흥부사, 제주목사, 포도대장, 공조판서가 된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지옥의 세상이었다. 왜군의 살육도 문제지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구원온 명나라 군인들의 추태도 극에 달해 종로에서 술 취한 명나라 군졸이 토해낸 음식물을 굶주린 백성들이 게걸스럽게 핥아 먹었다. 명나라 군인들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을 능멸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낙오병들이 때지어 다니면서 난동부리는 것을 무과에 급제한 변양걸이 막아내 훈련대장으로 복직되고 임진왜란 때 강화도를 지킨 공을 세웠고, 길주목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충청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불천위 사당과 간재정.
불천위 사당과 간재정.

#. 동호 변영청과 동호정


원주 변씨가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 정착한 것은 변안렬의 6대손 변광이 안동 권씨 권철경의 사위가 되면서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주로 처가살이 하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큰아들 동호 변영청(1516~1580)은 금계에 살면서 동호파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셋째아들 변영순(1523~?)은 봉화 거촌으로 이사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수온당 종택 등으로 이어왔다.

동호 변영청은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명종(재위1545~1567)이 등극할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주로 언관 등의 일을 보다 뒤에 남원부사, 대구부사, 청송부사 등의 외직을 보내면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한 선비의 삶으로 살았다. 동호정(東湖亭)은 1551년(명종6년) 어린 명종을 수렴청정 하던 문정왕후의 친정 윤씨들의 전횡을 강한 어조로 상소하여 파직당하고 낙향한다. 처가가 있는 안동 동쪽 법흥리 고성이씨 임청각 언덕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 동호정을 짓고 자신의 호도 동호라 한다. 이보다 19년 전인 1532년 중종(1506~1544)의 사돈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한 회재 이언적(1491~1553)도 고향 경주에 와서 나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獨樂堂)을 짓는다. 독락당은 송나라 신종 때 급진적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의 신법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사마광(1019~1086)이 스스로 퇴임하고 낙향하여 독락원을 지었듯이, 회재도 독락원을 그리며 지었을 것이다. 동호 변영청도 북송의 인종 때 곽황후 폐립문제로 재상 여이간과 대립하다 쫓겨난 범중엄((989~1052)이 동정호에 ‘등악양루기’의 문구를 상기하면서 낙동강가에 동호정을 지었을 것이다.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는 중국 최대의 호수로 중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묵객들은 자신의 포부를 쏟아내었다. 시성 두보(712~770)도 ‘등악양루’시에서“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에 떠있구나(乾坤日夜浮)”로 노래했고, 범중엄의 ‘등악양루기’의 마지막 구절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야 즐거워한다(後天下之樂而樂歟).”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관료들이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명구다. 그래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중국 문명의 보배 같은 정신유산으로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극찬했던 것이다.

동호 변영청이 죽자 임청각 처가에 살던 가족들은 선조의 터전이었던 서후 금계로 왔고 동호정도 퇴락하였다.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고자 1926년 후손들이 옛 터전금계로 옮겨지은 동호정을 찾았다. 학봉종택 건너 마을 산언덕에 있었다. 서산에 지는 햇살마냥 사람 떠난 동호정은 말없이 서 있었다.
 

화목한 열친회 모임.  /간재 종택 제공
화목한 열친회 모임. /간재 종택 제공

#. 간재 종택의 충과 효와 간재정

동호정에서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간재 종택은 몇 달째 안동에 오면서 올해만 세 번째 찾았다. 언제나 차분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간재의 11대 주영숙 종부와 변성렬 종손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종택 입구 연 밭 위에 거문고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금학정 정자는 근래에 세웠고 그 앞에 소나무 군상들이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다른 종택과는 다르게 충과 효를 상징하는 정려각과 홍살문이 시선을 끈다. 간재 변중일(1575~1660)은 동호 변영청의 손자로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 때 병든 조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은 왜병이 병간호 잘하라며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징표로 칼을 주고 간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받았다. 군량미 100석을 상주 진영으로 보내고 18세의 어린나이에 형 변희일과 곽재우 의병장 아래서 왜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충과 효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동쪽언덕에 검소한 간재정을 짓고 간재기를 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입체적으로 분석해야 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알려면 기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청각에서 옮겨지은 동호정.
임청각에서 옮겨지은 동호정.

다산 정약용은 수오재기에서, 갈암 이현일은 갈암기에서, 간재는 간재기를 통해서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낸다. “일찍이 군자의 도는 중도(中道)로 가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중도는 성덕(成德)이 아니면 할 수 없으나 치우치면 지향하는 사람이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감히 성덕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또한 지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간(簡)에서 뜻을 취한 까닭이 어찌 중(中)을 버리고 치우침에서 취한 것이겠는가로 자신의 뜻을 삼았다.

종택의 본채와 이어진 누마루 사랑채는 예서로 묵직하게 쓴 충효고가(忠孝古家)가 간재 종택의 정신을 상징한다. 본체의 대들보가 자연스런 멋은 좋은데 너무 굴곡이 급반전하여 악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집 뒤에 불천위 위폐를 모신 사당을 둘러보고 외따로 떨어진 간재정으로 갔다. 백일홍이 충과 효를 실천했던 선비의 정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간재정도 간재가 소박하게 지어 거문고를 곁에 두고 학문하면서 강학을 하던 곳이었는데 후손들이 줄여서 지은 것인데 단정한 맛이 난다.

현대사회는 개인단위로 삶이 형성되어 있어 집안과 여러 문중이 함께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간재 종부와 종손이 구심점이 되어 매년 8월이면 9녀2남의 가족, 친지들과 외손, 안동의 여러 문중 분들을 모시고 만남으로 정을 쌓고 음식으로 기쁨을 주고받으며 화합하는 ‘열친회(熱親會)’는 본받을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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