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겨울 청량산 기행 떠나는 송암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겨울 청량산 기행 떠나는 송암
  • 등록일 2020.07.14 19:04
  • 게재일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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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송암 권호문과 관물당
그리고 청성서원

송암 종택과 관물당.
송암 종택과 관물당.

지금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주는 돈만 주기 때문에 건축주 자신의 혼을 담은 집이라기보다 건축가의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건축주가 건축가였다. 스승 퇴계가 5채를 직접 터를 골라 지었듯이 제자들도 스승을 닮아 송암 권호문(1532~1587)도 자신의 뜻대로 집을 짓는다.

문학하는 선비학자로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망이 높아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은 1608년(선조41)에 세웠다가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 청운의 꿈을 접고

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도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입신양명이었다. 양명학이 심학을 중시한다면 주자학은 현실참여가 요체인데 조선은 주자학만이 정통이어서 특히 벼슬에 나가 가문과 집안을 살리고 주위에서 선망하는 만큼 부모의 기쁨이었다. 자연을 벗 삼기 좋아하는 농암 이현보가 당상관이 되자 농암의 어머님 권씨 부인은 종들에게 선반가 환영시를 지어 부르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었고 최상의 효였다. 송암도 안동 권씨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공부하기 위한 백 그라운드도 최상이었다. 어머니는 퇴계의 큰형 이잠의 딸이라 퇴계는 외종조부가 되기에 15살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임종까지 지켜본 제자로 혈연과 학연이 연결된다.

송암은 어릴 때는 아버지 권육에게 글을 배워 6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사람은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송암은 책을 들고 자신의 집을 감싸고 있는 청성산의 백운암, 분암 등의 절에서 독서를 하였던 문학소년이었다. 송암도 평생을 안동에 살면서 자연과 벗 삼아 학문과 문학에 매진하는 삶을 산 것이다. 옛 선비들이 글 읽기 좋은 장소가 절이었고 80년대까지 고시원 역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라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절에 가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스님을 종 부리듯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암도 주위의 봉정사, 청량사,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옮겨온 청성서원.
옮겨온 청성서원.

18살(1949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살(1561년)에 어머님의 당부로 부(賦)와 시(詩)의 문예창작 능력을 보는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생원시, 진사시(사마시)에 합격한다고 벼슬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 살이 하면서 죽만 먹을 정도로 슬픈 예를 다한다. 그때 “애당초 과거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 때문인데 이제는 급제한들 누가 자랑스러워하며 과거공부해서 뭣하겠는가.”하였다.

37살(1568년)에 무슨 갈등이 생겼는지 집 뒤 청성산에서 학봉과 과거공부에 몰두한다, 학봉은 합격하고 송암은 떨어져 이때부터 본격적인 자연과 벗하며 문인의 길로 접어든다. 퇴계가 심신 수양했던 청량산을 자신의 산(吾家山)이라 했듯이, 송암도 호를 청성산의 바위와 산 이름을 딴 송암, 청성으로 했다.

1585년 학봉은 17년 전 송암과 과거 공부했던 청성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생각했는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쓴다. 송암은 학봉에게 청성산 반을 떼어준다. 학봉은 석문정사를 지었고, 지금도 청성산의 소유권은 그때 그대로다.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통큰 선비였다.
 

왼쪽에서 본 청성서원.
왼쪽에서 본 청성서원.

#. 한서재를 짓고

초야에 묻혀산 선비 송암 권호문이 살았던 안동 서후면 교리에 있는 송암 고택과 청성서원에 갔다, 우리나라 지명에 교리, 교촌은 향교가 있던 자리인데 여기도 고려시대 관학인 향교가 있었다. 입구에 두어 집 있고 막다른 골에 송암 종택이 외롭게 있다. 종택 입구에 송암이 20살(1551년)때 지은 한서재가 퇴락한 채 서 있다.

여기를 선택한 한서재기(寒棲齋記)에는 “시냇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소나무 밑 아슬아슬한 바위모서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충분히 깃들어 살만했다. 이에 산 능선을 깎아 초가를 지었다. 한 칸은 따뜻한 방으로 하고, 두 칸은 시원한 마루로 만들었다.…. 유유자적하며 물상을 찾아다니노라면 들판의 푸른 풀, 긴 제방의 파란 버들, 봄날의 안개와 가을의 비.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등이 사시사철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공해주며 세속의 티끌 묻은 생각을 씻어준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즐기는 여덟 가지를 읊는데 고요한 밤, 그윽한 창가에서 책을 덮고 홀로 앉아 달그림자 비추면 거문고에 노래를 실어 회포를 푸는 대월음(對月琴)이 마지막 여덟째라 했다. 이곳을 보고 와서 이 글 쓰고 있는 지금의 경주 수오재에는 달 대신 밤비가 하염없이 내려 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처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이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송암은 달을 감상하면서 거문고에 노래를 불렀지만, 필자는 만물과 부딪힌 빗소리와 개구리 합창에 방해가 될까봐 단소는 불지 않자 온 몸에 소리가 스며드는 대우성(對雨聲)이었다. 절이 공부하기는 좋아도 일시적이지 장기적으로는 힘들고, 정자는 가유(可留) 지언정 불가거(不可居), 즉 머물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창작공간이 필요하여 송암은 한서재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송암은 끊임없이 내면의 이치에 몰두했다.

 

오른쪽에서 본 청성서원.
오른쪽에서 본 청성서원.

#. 관물당과 청량산기행

한서재 뒤에는 사람 살지 않는 종택이 좁은 골짜기를 꽉 메우듯이 앉아있다. 종택 안에 있는 관물당은 1569년 송암이 38살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송암은 관아당(觀我堂)이라 했는데, 스승 퇴계가 “사물을 관찰하면서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의 관물당(觀物堂)으로 바꾸어준다. 송암은 25세 때 청량산을 유람하고 108운의 장편시를 퇴계에게 지어 올리자 퇴계는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루하고 산만하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문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런 따가운 지적과 혹독한 비평은 퇴계의 수많은 제자 중에 문학을 이어받은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 관물당을 짓고 다음해 1570년 39살 송암은 겨울에 한 달가량 청량산 기행을 떠나와서 기행문을 완성한다. 시도 1천700여 수가 있지만 기행문은 그 사람의 향기와 살아있는 진솔한 글이라 글쓴이의 내면을 알 수 있다. 기행작가인 필자도 선현들의 기행문을 아끼고 사랑한다. 송암도 겨울 청량산 기행을 계획하고 책과 지필묵, 벗과 퇴계에게 드릴 단술 두 항아리와 채소, 과일을 챙기고 떠나려하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 겨울 혹한이냐고 의아해 한다. 가다가 만난 지인들도 산은 봄, 가을이 좋고 겨울은 적합하지 않다 한다. 단 퇴계는 “그 산은 겨울 경치가 좋지, 다만 바람이 몰아칠 때는 숲이 흔들리면서 온갖 소리가 나고 다시는 잠잠해질 같이 않으니, 모름지기 남향으로 난 작은 암자가 있는 조용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퇴락한 한서재.
퇴락한 한서재.

청량산 유람할 때 스님들이 길잡이에 심부름하고, 절에 도착하면 늙은 승려가 엎어질 듯이 달려나와 맞이하는 당시의 하늘과 땅 차이의 신분을 여실히 보여준다. 송암은 술을 매우 즐겨 떠나올 때 술 챙겨왔고 만나는 지인과 밤새 마시고 시를 주고받는 낭만이 넘치는 선비였다. 술을 마시고 흥이나 스님 둘을 불러 술병과 벼루와 종이를 들게 하고, 치원대에 올라 쉬고 있을 때 안중사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이한다.

밤에 늙은 승려가 “노스님께서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하자 송암은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천지 만물 가운데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슬퍼하랴.

이런 객관적 입장이 숙소 벽에 붙어 있는 김계순(1534~1570)의 시를 보고 먹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듯한데 먼저 죽어 손으로 이름을 어루만지며 한참동안 슬퍼한다. 청량산 기행 중에 퇴계의 위중을 승려들이 알려와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고, 시중든 사람이 70여 명이 있는 가운데 돌아가시자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니 그 슬픔을 어찌하랴 또 많은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통곡은 이어진다.

어젯 밤부터 진종일 비가 내리는 오늘은 검사, 인권 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의 기득권을 가졌지만, 약자 편에서 많은 아름다운 일을 해오다 성 추행 의혹의 치욕적인 불명예를 죽음으로 사죄했지만, 새로운 불씨를 남긴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식이다.

필자를 인터뷰하고 이틀을 우리 집 수오재에서 자면서 경주의 문화유적을 안내했던 인연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먹구름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죽음은 나와의 관계에서 슬픔의 강도가 달라진다.

관물당을 나와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으로 갔다. 1608년에 세워 176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09년 도내 유림들의 뜻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사람은 배우는 것보다 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백두산기행을 남긴 당주 박종(1750~1793)은 험한 백두산을 떠날 행장도 준비 안 되었고, 아이도 앓고 있어 주위에서 만류하였으나 박종은 ‘만일에 근심걱정 다 가시고 행장을 갖추어 준비된 후에 가자면 평생을 기다려도 가볼 날이 없을 거라며 떠나듯이, 송암도 부인이 호랑이한데 물리는 일이 많아 걱정하자 “공부는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면서 청량산으로 떠난 것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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