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구는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위해 목숨을 건 가출을 감행한다
채동구는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위해 목숨을 건 가출을 감행한다
  • 등록일 2020.06.22 19:49
  • 게재일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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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 문학적 상상력 키운 성석제 (하)

경북 상주는 소설가 성석제 문학의 발원지다. 상주 경천섬의 아름다운 풍광.
경북 상주는 소설가 성석제 문학의 발원지다. 상주 경천섬의 아름다운 풍광.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처음 ‘문학과 사회’에 연재(2002)되었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200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가난한 시골 양반 채동구(蔡東求)의 출세기이다. 그는 1627년의 정묘호란이나 1636년의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의 위기마다 가출함으로써 이름 없는 지방의 유생에서 사후(死後)에 문경공(文景公)이라는 시호를 받는 존귀한 자로 격상된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1596년에 태어나 7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채이항이라는 실존인물을 기록한 ‘오봉선생실기’(채광식 역편, 인천 채씨 경헌공파 종문 1989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 ‘오봉선생실기’를 찾아보면, 대체적인 내용이 ‘인간의 힘’과 부합하며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가 바뀐 것(채이항이 채동구로, 몽선이 명선으로, 이후갑이 이원겸으로)을 확인할 수 있다.

 

… 채동구가 변모함에 따라,

서술자의 어조는 냉소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찬양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서술자의 변모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독자 역시도

돈키호테적인 기인으로만 여기던 채

동구를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진정한 힘을 보여준 인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남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초지일관해서 자신의 길을 간

채동구는 어쩌면

가장 전근대적인 외양을 하고서

가장 근대적인 윤리를 실천한

최초의 인류인지도 모른다. …




‘인간의 힘’은 채동구가 조상 대대로 경북 고령에 살아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고령 지역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상세하다. 그러나 채동구의 모델이 된 채이항(蔡以恒)은 성석제와 마찬가지로 경북 상주에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성석제는 자신의 집안이 노론에 속했으며, 같은 당색을 가진 집안인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의 인천 채씨 집안과 계속 통혼을 해왔다면서, 그 인연으로 집필한 소설이 ‘인간의 힘’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아가 ‘인간의 힘’의 주인공이 살던 곳은 상주시 이아면이라고 분명하게 덧붙이고 있다. (영남일보, 2010.5.31.)

나라에 변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집을 나서는 시골 양반 채동구는 칸트(1724-1804)가 말한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성석제 식으로 능청을 떨자면, 아마도 칸트는 ‘실천이성비판’과 ‘윤리형이상학 정초’ 등에서 목 놓아 주장한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한 인물이 자기보다 100여 전에 조선에서 살다 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칸트는 보편적인 윤리는 ‘자유로워라’라는 정언명령(定言命令,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에 충실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행복주의나 공동체의 규범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란 본래 다른 데에 원인이 없고 순수하게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시한다면 ‘자기 안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본능, 욕망, 감정 등에 ‘나’를 맡기는 것이 되어서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공동체의 규범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어서 자유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채동구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창공의 별처럼 빛나는 ‘충성과 숭명대의(崇明大義)’라는 가치에 너무나 충실하여, 권하는 이 아무도 없고, 그래야 할 능력도 이유도 없지만, 나라의 변이 있을 때마다 칼집에서 뽑히지도 않는 칼을 차고 집을 나선다. 이괄의 난에는 임금이 피난한 공주까지, 정묘호란에는 강화도까지,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까지, 나중에는 청의 수도인 심양까지 가는 것이다. 채동구가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벌이는 이 네 번의 소동은 모두 칸트의 ‘자유로워라’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한 결과이다.

성석제 소설 ‘인간의 힘’.
성석제 소설 ‘인간의 힘’.

먼저 그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복주의를 극복하였다. 채동구의 가출은 자기 안의 자연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삶에의 본능을 이겨낸 행동이기 때문이다. 채동구의 모든 출도가 목숨을 건 행동이지만, 특히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까지 간 행위는 그야말로 삶을 깨끗이 단념했을 때만 가능하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지 6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군의 무력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거란족들은 입버릇처럼 “여진 군사가 만약 1만 명을 채운다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여진족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했는데, 1126년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기병 17명이 송나라 군사 2천 명을 간단히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묘호란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평안도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미처 알지 못하던 조선군 1천여 명이 여진족 기병을 가로막자 겨우 10여 명의 기병이 조선의 관원 4명과 병사 50명을 죽이고 100필의 말을 빼앗았다고 한다.(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126-127면) 이러한 사실을 채동구라고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출도할 때, “동구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도 하기 싫고 가기 싫고 죽기 싫다는 마음”이 존재했다. 그러나 채동구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충성, 숭명대의’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가출을 감행한다.

동시에 채동구의 행위는 공동체의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충성과 숭명대의는 17세기 양반 사대부의 공통된 신념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허태구,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소명출판, 2019, 345-362면) 그렇지만 채동구가 직접 뽑히지도 않는 칼을 차고 전장으로 향하는 실천은 결코 공동체의 규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채동구는 조상의 음덕으로 군정(軍丁)을 면제받는 양반임은 분명하나 후취의 아들로서 별다른 학문도 없으며, 과거(科擧)는 처음부터 체질에 맞지 않아 벼슬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양반으로 갖춰야 할 혈통, 학문, 관직 중의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갖췄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힘’의 상당 부분은 채동구의 가출이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를 보여주는데 바쳐져 있다. 동구의 형인 동정은 가출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위기로 몰아넣는 동구와 의절을 할 지경이고, 문중과 향토 사족들은 모두 동구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이것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가게 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던 사대부인 전 예조판서 김상헌, 전 지평 조한영과 함께 이전이나 지금이나 늘 학생(學生)일 뿐인 채동구가 심양으로 가게 되었을 때, 임금은 채동구에게 한글로 “너는 조한영처럼 직임을 맡아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김상헌과도 처지가 다르니, 반드시 죽으려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여 채동구의 심양행이 조선이라는 사회의 규범과는 거리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청나라 통역조차도 동구에게 “너는 벼슬도 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마음으로 감히 대국의 처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말을 늘어놓았는가?”라고 의아해할 정도이다.

이처럼 동구의 가출은 행복주의나 공동체의 규범을 부정한, 그야말로 ‘자유로워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한 윤리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동구가 “맨주먹과 가슴의 붉은 피” 하나만 가지고 행하는 가출이란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의지의 표상”이였던 것이다. 동구 역시 자신의 출도가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해야 할 바를 찾아서 할 일을 했을 뿐이네.”라며, “나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하던 놈이 한둘이던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인간의 힘’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은 심양에서 용맹으로 명성이 높은 용골대(잉굴다이)의 심문을 받으며, “나는 내 뜻을 내가 지키고, 내 머리를 내 목 위에 두고 산다. 내가 내 입으로 내 말을 하는데 너희가 무엇이관대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이냐!”라고 동네 개를 꾸짖듯 일갈할 때이다. “오재오두(吾載吾頭, 내 머리를 내가 이고 있다)”라는 표현은 “자신이 정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남김없이 불태울 줄 아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칸트적 윤리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채동구의 삶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태도도 작품의 진행과 함께 점차 변한다. 처음 서술자는 전지적인 입장에서 행장 등의 기록이 채동구의 삶을 어떻게 미화했는지를 밝히는데 열을 올린다. 일테면 ‘국가의 위기시마다 가보인 칼을 뽑는데 그때마다 칼집에서 칼이 나오지 않는다’든가, ‘처음 보는 이에게 피끓는 우국충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눈을 떠보니 상대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출로 채동구가 변모함에 따라, 서술자의 어조는 냉소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찬양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서술자의 변모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독자 역시도 돈키호테적인 기인으로만 여기던 채동구를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진정한 힘을 보여준 인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남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초지일관해서 자신의 길을 간 채동구는 어쩌면 가장 전근대적인 외양을 하고서 가장 근대적인 윤리를 실천한 최초의 인류인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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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2020-06-22 21:45:41
"나는 내 뜻을 내가 지키고, 내 머리를 내 목 위에 두고 산다. 내가 내 입으로 내 말을 하는데 너희가 무엇이관대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이냐!" 옳다고 여겼음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을 보여준 의인이기도 하군요.
가보인 칼집에서 칼이 나오지 않고, 우국충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눈을 떠 보니 상대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다니요. 정말 웃음이 나오는군요.
목숨 위협이나 남들의 조롱이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하게 자신의 길을 간 채동구에세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