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을 들어서며 본 무봉사 무량문. 무봉사는 경남 밀양시 영남루 1길 16-11에 위치해 있다.

이름만으로도 끌리는 도시 밀양, 영남루 바로 옆에 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남루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수선한데, 그곳에서 살짝 돌아 앉은 무봉사 가는 길은 대숲이 밀양강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호젓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로 해탈문을 대신하는 무량문(無量門)이 보이고 작은 문안으로 하늘을 나는 봉황 모형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힌다.

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세운 절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절이 타고 없어지자, 당시 무봉암이었던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키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무봉사는 봉황이 춤추는 모습인 이곳 지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봉사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힘들 때, 날개에 태극무늬가 있는 나비가 무봉사가 있는 아동산을 날아다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나, 지금도 태극나비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무봉사를 참배한다고 한다.

일주문에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지만 우측으로 밀양강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절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정갈하고 고요하다. 대웅전에서 피부가 맑고 고운 비구니스님이 예불을 끝내고 막 나오실 것만 같은데, 아름드리나무들이 사찰을 지키고 봉황 두 마리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나비를 보지 않아도 길한 기운들이 내게로 전해져 올 것만 같다.

참배는 되도록 짧게 끝내라는 안내문이 대웅전 법당 앞에 선 나를 주춤거리게 만든다. 매 주 산사를 찾아 백팔 배 하겠노라는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남편과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고 참배자들이 직접 연락처를 기입하도록 방명록을 준비해 둔 세심함까지, 대웅전 법당 마루도 유난히 정갈하여 구석구석 여성성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보물 제 493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과 5구의 화불이 장식된 광배는 조각솜씨가 뛰어나고 화려하다. 법당 앞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푸르고, 지장전 가는 모퉁이길 쪽에서 바라보는 절의 풍경도 멋스럽다. 무엇보다 절과 이어지는 두 갈래의 오솔길이 유혹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저만큼 걷다 돌아서고 말았다.

운이 좋게 포행을 가시려던 스님과 마주친다. 비구니 스님이 아니라 평온한 인상의 비구 스님이다. 인사를 나누고 스님과 함께 둘레길을 걷는다. 스님은 아동산과 무봉사의 역사, 밀양읍성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작은 절이지만 종각이 따로 있어 무봉사의 봉황이 날아가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아침저녁으로 타종을 하신다는 말씀까지 친절히 들려주신다.

둘레길은 약간의 가파름을 숨기고 아동산 허리를 감고 이어진다. 초록은 녹음으로 변해 햇살을 차단하고 푸른 그늘을 드리운 오솔길을 만들고 있었다. 인적 없는 낯선 숲길이 스님이 계셔 든든하다. 벌걸음이 빠른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걷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태극무늬 나비 한 마리 왔다가 사라진 것처럼.

모처럼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은 요즘, 함께 다녔던 절과 숲, 도시를 떠난 일 년간의 삶을 돌아본다. 전원생활을 반대하던 남편이 쉽게 적응해 준 것도, 번번이 절 기행에 동참해주며 낮고 겸허한 자세로 법당에 들어서는 점도 고맙다. 그로 인해 공통의 관심거리가 생겼으며 대화도 많아졌다.

이따금씩 알 수 없는 향기가 날아와 대화는 자주 멈춰야 했다.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돌아보게 만든 것은 백화등 향기였다. 나무들을 감고 울창하게 정글을 이루는 백화등 꽃무리에 탄성을 쏟아낸다.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황홀하다. 적어도 백화등 덩굴에 감겨 질식할 것만 같은 나무들의 창백한 표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둠을 지닌 안쓰러운 생동감과 저 아득한 몸짓들, 내 안에서 한 마리 나비가 파닥거린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밀양읍성 동문이 보일 무렵 우리는 성곽을 밟으며 다시 무봉사 쪽으로 향한다. 산책길 초입 쉼터에서 움츠리고 있던 한 남자가 생각났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을 벗 삼아 강물의 소용돌이에 쓸려버릴 듯 작은 체구의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쩌면 태극나비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우리와 함께 걷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일상에서 만난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 지친 날개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다. 운이 좋아 무봉사 타종 소리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고 젖어들어 그의 어둠을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행운이란 그렇게 아무도 몰래 조용히 가슴을 흔들고 가는 것이리라.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날개 꺾인 한 마리 태극나비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찾아 이곳까지 날아온 전설 속의 나비를 나는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백화등 향기는 더 이상 따라 오지 않았고, 무봉사는 말없이 밀양강만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