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마르첼리노….

오월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삼월인가 했더니 눈 깜짝할 새 사월이 가고, 오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연녹색 나무가 순식간에 신록으로 변해 눈앞에 넘실댄다. 자연은 예나 다름없이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오월은 어디를 걷고 있는지 헷갈린다.

가만히 올봄을 되돌아본다. 내 봄은 별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춘분이 한 달가량 남은 날이었지. 가로수 보호대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사뿐히 내려앉는 별을 보듬고 세상을 비추는 새 생명을 만난 거야. 대낮 땅바닥에서 하얀 별빛을 온 누리에 비추는 앙증스러운 존재, 바로 별꽃 말이야. 삼월이 되자 벚꽃에게 자리를 양보한 듯 보였지만, 낮은 곳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별이었다.

마르첼리노.

환하게 거리를 밝힌 벚꽃을 사열(査閱)하는 멋도, 그 아래 보도를 걸어보는 행복도 올핸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위력에 짓눌려, 엄두도 못 내다 드라이브 스루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거든. 화무십일홍이라 하듯 벚꽃의 화사함도 요정처럼 사라져 버리더구나. 뒤이어 줄 서서 피어난 조팝나무꽃이 사월을 밝히기 시작했지. 공조팝나무에 탐스러운 등불이 켜지고 덩달아 산조팝나무도 신록 사이에서 등대같이 빛났다. 하지만 무심한 나는 별빛도, 등불도, 등댓불도 느끼려 하지 않았다. 그사이 계절의 수레는 나를 두고 오월로 도망치고 말았지. 사람들이 마스크를 낀 채, 다른 이를 피하며 총총 지나가는 출근길 모습을 만나며 걷던 오월 어느 아침이었어. 문득, 하늘을 쳐다본 내 눈에 이팝꽃이 하얀 신부(新婦)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겠나. ‘아, 벌써 이렇게 되었어!’ 혼잣말을 되뇌며 반갑게 쳐다보았지. 그러고 보니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자’던 그 옛날, 한 문우와의 다짐도 잊고 살아온 게야.

마르첼리노.

하얀 오월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이팝꽃 앞에서 하얀 오월을 알아채게 된 게야. 삼월에 활짝 핀 하얀 별꽃에 이어 조팝꽃들과 이름 모르는 꽃들이 하얀 사월을 밝게 비추어주었지. 하지만, 내 눈엔 사람들의 하얀 마스크만 들어 올 뿐이었어. 무딘 마음이 하얀 삼, 사월을 외면한 게지. 왜 한눈에 모든 것을 알아보지 못할까. 정말 육신의 눈은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올봄, 이곳엔 줄곧 하얀 이팝꽃이 유난히도 많고 탐스럽게 피어났다. 철길 숲은 물론, 고속도로 진입 가로, 터널 앞의 고속도로 분리 화단, 고향 가는 국도변에도 하얀 꽃들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어.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사람들은 이팝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꽃. 아이러니하게도 보릿고개를 물리친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은 이팝꽃을 만난다.

마르첼리노.

하얀 방호복의 전사(戰士)로 무장한 방역진과 의료진…. 코로나19 방역과 치료의 전선(戰線)에 출전하여, 고군분투하는 그들 모습이 일상으로 스며든 봄을 살아온 우리들. 왜 올봄은 하얀 오월이 끝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일까. 백의민족이라도 다시 일깨우려 함인가. 혹시, 우리가 백의민족의 혼을 잃기라도 한다는 하늘의 계시란 말인가. 거짓과 선동에 찌들어, 불의와 정의를 식별하지 못하고 생활의 불안에 내몰려 사는 동안, 조상들이 섬겨온 하늘과 땅을 멀리한 것은 아닌가. 나, 너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하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

곳곳에 장미꽃이 붉은 얼굴을 한껏 열어젖히고, ‘그대 내게 와서 사랑의 오월을 누려보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삼월과 사월을 관통한 하얀 오월은 침묵과 외면, 무시와 강행의 카르텔을 덮어쓴 장미의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물러서지도 않는다. 뒤이어 피는 하얀 찔레꽃과 하얀 꽃들이 쏘는 푸른 레이저광선이, 장미 아가씨의 삿된 유혹에 취할 때가 아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기에…….

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

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