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실 종택과 수애당, 정재 종택

무실 대종택.
무실 대종택.

안동댐과 같이 임하댐 물속에도 여러 마을과 집성촌이 있었다. 대부분 그대로 수몰되고 일부고택들만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었다. 그러나 온갖 사연과 애환이 묻어있는 정겨운 집들과 골목까지 옮겨온 것이 아니기에 그 아련한 향수는 고향 잃은 실향민들의 가슴에 멍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박곡, 무실(수곡)마을의 전주 류씨 무실 집성촌의 집들 중에 수몰지 근처로 옮겨지은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 그리고 강(임하댐) 건너 언덕으로 옮긴 정재 종택을 찾아 나섰다.

안동에 8주째 매주 가다 보니 봄을 두 번이나 만끽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남쪽 경주에서 북쪽 안동까지 약 400리 거리의 간격에 1주일 정도 꽃의 개화기 차이 때문이다.

#. 조상의 음덕과 집성촌의 사연

지금이야 문중보다 개인의 삶과 행복이 더 중요한 시대지만 그래도 조상 중에 큰 벼슬했거나 학식이 뛰어나면 긍지를 가슴에 안고 있다. 안동만 하더라도 진성 이씨들은 벼슬보다 자신을 갈고닦는 수양에 힘쓴 조선 성리학의 거봉 퇴계 이황을, 풍산 유씨들은 국난 극복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으로, 영천 이씨들은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농암 이현보로, 고성 이씨들은 독립운동 집안의 석주 이상룡으로, 의성 김씨들은 학봉 김성일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산다. 전주 류씨 류습의 7대손 류윤성이 서울에 살다 영주의 반남 박씨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 와서 낳은 아들 유성은 안동 내앞(천전)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사위가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수곡)에 정착하여 전주 류씨 무실파의 입향조가 된다. 신부의 집에 사는 처가살이 하는 ‘남귀여가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등살에 친정과 환경이 전혀 다른 시가 댁에 시집살이하듯이, 처가살이하는 신랑은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와 친구들과 이별하고 처가에 산다는 것은 늘 긴장 속에 살았을 것이다. 실향민들 1세대는 가슴에 한이 있지만 2세대는 다르듯이 처가살이 1세대 지나면 자신의 고향이 되기 때문에 괜찮다. 그래서 1세대 처가살이 분들은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일찍 죽는다. 어린 아이들은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다. 그 이어진 친가와 외가의 문중은 후대까지 끈끈한 연결고리가 된다.

우리나라 집성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손소는 풍덕 유씨 류복하의 무남독녀 사위로 처가살이한다. 큰 아들 손백돈은 처가살이하다 요절하고,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이 청백리가 되어 오늘날 양동마을을 이룬다. 경주 손씨(양동 손씨) 입향조 손소의 사위 이번(1463~1500)도 양동마을에 처가살이하다 37살에 죽는다. 그의 큰아들 이언적은 외삼촌 손중돈에게 학문을 익혀 동방5현으로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오늘날 양동 이씨(여강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정재 종택.
정재 종택.

무실마을의 입향조 류성(1533~1560)도 27살에 어린 아들 두 명 두고 요절한다.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자란 큰 아들 기봉 류복기(1555~1617)는 임진왜란 때 최소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 아들 류복립은 외삼촌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후손이 없다. 그래서 지금 무실파 자손들은 기봉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청계 김진이 쓸려고 한 묘터를 사위 류성이 일찍 죽자 양보한다. 그 터가 명당이라 무실 류씨들이 발복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가 나왔다는데 필자는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고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지 풍수의 명당론은 허구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민사소송의 대부분이 묘지싸움이다. 양동마을의 양동 손씨, 양동 이씨들과 같이 의성 김씨와 무실 류씨들도 이런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온 것이다. 입향조 유성의 묘터를 준 외가에 고마움으로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제삿날 제물을 보내준다고 한다.
 

길고 큰 수애당.
길고 큰 수애당.

#. 임하댐과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

경주에서 안동 중심부나 서쪽으로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지만 동편 임하댐 쪽으로 갈 때는 동해안을 끼고 영덕 청송 진보로 가거나 오늘처럼 청송 길안 쪽으로 가면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이 된다. 청송 송소 고택 앞을 지나 길안 쪽으로 굽이굽이 시골길은 눈물 나는 정서가 있다. 산기슭에 마을이 오순도순 이어지고 협소한 논에 비탈진 밭의 풍경은 옛 시골의 애환 어린 아련한 풍경이라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용계리에 접어들자 임하댐 맑은 물이 녹색 산천의 풀빛과 어우러져 아득한 태고의 신비로 젖어든다. 15미터 위로 옮겨놓은 용계리 은행나무는 반달 전에 움트지 않던 은행잎이 힘겨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싹트고 있었다. ‘도연교’아래 좌, 우의 임하댐은 환상적이라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의성김씨 지례파의 낭만과 비극이 교차되는 도연폭포 바위가 머리만 드러내고 있었다.

댐 아래에서 옮겨온 기양서당으로 갔다. 세종 때 학자인 회헌 류의손(1398~1450)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 기봉 류복기(1555~1617)의 위폐를 모시고 기봉의 후손들이 수학과 휴식을 위한 서당이다. 강당은 5칸 원기둥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단단하고 야무진 짜임새의 속이 꽉 찬 건물이다. 역락당(亦樂堂)으로 한 것으로 보아서는 학문의 즐거움을 실천하겠다는 무실 류씨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하고, 담벼락에 붉은 꽃들은 나그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근처에 무실 종택과 수애당으로 갔다. 망향정 정자는 튼실하게 잘 지어져 댐 아래 잠겨있는 마을을 굽어보고 긴 수애당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그 위에는 무실 종택이 말없이 있는데 붉은 꽃들이 간간히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실파 대종택은 1600년 말이나 1700년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면 7칸 측면 6칸의 긴 건물이다. 안채를 둘러싼 긴 사랑채 한쪽을 정자형으로 돌출시켜 실용과 멋을 부렸다.
 

애당 대청에서 류효진 종손.
애당 대청에서 류효진 종손.

#. 수애당의 류효진 종손, 정재종택과 류성호 종손

집이란 건물과 터도 중요하지만 누가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집과 사람이 일체감을 보일 때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다. 필자는 문화유산의 폐사지나 고택을 쓸 때 스님을 만나거나 고택주인을 연락해놓고 만나지는 않는다. 당사자를 만나면 장점만 부각하고 단점은 감추고 안면 때문에 객관적으로 쓰기에 제약을 받는다. 혹 인연되어 만나면 인사 정도 하고 만다.

먼저 바깥을 쭉 둘러봤다. 길고 큰 건물이라 가정집이라기보다 객사나 관공서 같았다. 수애 류진걸이 1937년에 지은 건물이라 이 시기 일제강점기 때 지은 집 대부분이 크고 곧은 나무를 사용한 특징 때문에 정감이 흐르거나 낭만적인 맛은 없다. 당시에 이런 규모의 집은 큰 갑부라야 가능하다. 집안에서 여러 아궁이에 군불 때고 있기에 대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려 류효진님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경주에서 왔는데 잠시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하면서 다정하게 대청으로 안내한다. 차를 대접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독립운동 양성학교 협동학교 출신 수애당 지은 류진걸 조부는 토목기술자였는데 돈은 엄청 많았고 만주철도 기술자라 김일성이 안 보내주어 북한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단다. 건물 하나하나 살펴보니 곧은 나무로 빈틈 없이 잘 지은 집인데 대들보도 곧은 목재라 고택에서 휘어져 꿈틀대는 맛이 풍기는 긴장은 없다. 그래도 옳은 생각을 간직한 한량기질의 낭만이 흐르는 주인장이라 집에 생기가 돈다.

 

단단한 기양서당.
단단한 기양서당.

수애당 주인장은 한사코 점심 대접하겠다고 따라나서 같이 수곡다리 건너 정재 고택으로 갔다. 외따로 언덕위에서 임하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재 종택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1777~1861)의 고조부 양파 류관현(1692~1764)이 1735년에 지은 건물이다. 안채에 비해서 정면 6칸인 사랑채가 유독 커 보였다. 이 사랑채와 지례예술촌의 지산서당, 오류헌, 수애당 건물을 ‘고 대목’이라는 사람이 지은 집인데 수애당은 제일 마지막에 지은 집으로 미완성이었다는 류성호 종손의 설명에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무실 류씨들의 건물에 낭만이 흐르는 계자난간이 없는 것은 음풍농월을 경계하고 학문하겠다는 뜻이란다.

수애당 문정현 종부와 정재 종택의 김영한 종부는 필자가 1박2일 종부, 종손들 특강할 때 인연으로 경주 우리 집 수오재도 왔다갔는데 두 분 다 출타중이고 수애당 종손이 정재 종손과 나를 납치하듯이 진보까지 태워가 점심 대접한다. 피를 맑게 하는 정재 종택의 가양주 ‘송화주’는 종택에 오면 맛보여 주겠다했는데 몇 년 만에 왔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종부 없는 종택은 앙꼬없는 찐빵 격이지만 현대의 종부들은 집에서 하염없이 손님만 접대하는 시대는 지났다. 류효진 종손은 안동서 술 사겠다고 한사코 수애당에 자고 가라며 강하게 잡았으나 마음 아프게 정을 뿌리치고 와야 하는 내 마음도 아팠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