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컬리제이션
글로컬리제이션
  • 등록일 2020.03.25 19:56
  • 게재일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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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이제 단순히 서로 소통하는 수준을 넘어 ‘초연결성’으로 연결될 것이라 한다. 초연결성은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사물, 더 나아가 사물과 사물까지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4차산업혁명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초연결성으로 연결되어가는 지구촌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초연결성을 십분 활용하여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기 위한 협력을 해야 한다.

서로를 돕되 어느 한쪽도 지나친 종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늘 각자가 홀로 서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한 각자가 가진 기릴 만한 것들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서로에게 연결되고 취약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생각하면, 모든 의사 소통이 쉽고 자유로워져 누구도 외로울 것 같지 않아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알려져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정의가 바로 세워진 세상도 앞당겨 이룩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우리 모두가 각자의 좋은 것들을 서로 활발하게 나누게 된다면 세상은 더욱 풍요롭게 될 것도 같다.

하지만 하나로 연결된 우리는 우리의 좋은 점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탐욕과 문제점들도 거침없이 드러내어 우리를 큰 위험에 빠지게 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체에 매일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무책임한 댓글은 이미 우리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피해와 상처를 남기고 있다. 또한 스팸과 보이스피싱으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위협 받게 된 것도 어쩌면 우리가 서로 너무 가깝게 연결되었던 것이 화근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가 불러온 어려움도 하나로 묶여진 지구촌이 우리에게 주는 달콤함에 취해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보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안일함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돌아보면 14세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흑사병도 전유럽을 휩쓸었지만 그 피해는 서구 유럽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어떤 한 지역에 닥친 재앙이 대양을 건너 다른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순식간에 번질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로 온 인류가 한 마을을 이뤄 연결되어 소통한다는 지구촌의 눈부신 영광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도 먼 지구 반대편까지 여행도 하고 희귀한 물건은 먼 곳에서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과일을 집 앞 가게에서 아침 식사로 쉽게 사다 먹을 수 있고, 신혼 여행도 아닌 그저 그만그만한 이유로 한해에도 여러 번씩 수 백 마일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현대 기술 발전과 지구촌으로 묶여진 세상이 주는 이러한 달콤함에 매혹되어 우리는 코로나19, 돼지열병, 사스, 메르스 등의 유행병 때문에 혹독하게 치르게 될 위험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화로 인해 지구촌에 닥치는 재난은 전염병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국의 바트화에 닥친 위기가 우리나라에 IMF 구제금융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미국의 부동산 관련 대출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얽힌 금융가들의 윤리적 해이가 미국 경제를 흔들고 세계 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으며 한국과 아시아 경제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세계화를 통해 결합된 지구촌 경제를 건설하며, 그것이 주는 달콤함을 헤아리느라 혹시나 겪게 될지 모를 위험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했다.

글로컬리제이션은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벌리제이션과 지역화를 의미하는 로컬리제이션을 결합하여 세계화의 유익은 누리면서 지역화에 담긴 가치도 함께 취한다는 뜻의 말이다. 그런데 세계화가 주는 유익은 획일화를 통해 이루어 내는 경제적 효율성으로 지역적 특성과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지역화의 가치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침묵의 소리’와 같은 모순 어법의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모두 담긴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은 전혀 현실성 없는 이상이거나 신기루 같은 착시에 기인한 허상인 것 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 여러 시대적 요청들도 처음에는 말이 안되는 모순으로 우리 귀에 들려왔었다. 미국 흑인 노예의 해방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은 당시 노예들의 노동력에 기반을 둔 미국 경제의 안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여성의 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던 시대적 요청 또한 당시 여성이 맡아 수행하던 전통적 역할과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주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것을 택하면 저것을 잃어 버리고 저것을 택하면 이것을 잃어 버리는 양단간의 결정으로 보였다.

하지만 흑인 해방은 흑인의 노동력에 안일하게 기대어 있던 백인들의 보다 적극적인 경제 참여를 가져와 미국 경제는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여성 해방도 여성의 보다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이끌어 내며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여 보다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에 처음 듣기에 모순으로 들려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적 요청은 어쩌면 그 안에 모순이 되어 충돌하는 듯한 두 가치 모두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보라는 시대적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글러컬리제이션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도 세계화의 유익은 취하면서 지역화가 주는 가치를 성취하라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계화를 추구하면서도 경제적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편협함에 빠지지 않고, 지역화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배타성과 지역 이기주의를 멀리하라는 것이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말에 담긴 이 시대의 도전이다. 아직은 수수께끼 같이 들리는 글로컬리제이션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답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초연결성을 십분 활용하여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기 위한 협력을 해야 한다. 서로를 돕되 어느 한쪽도 지나친 종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늘 각자가 홀로 서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한 각자가 가진 기릴 만한 것들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서로에게 연결되고 취약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한다.

오직 내게 소중한 것만이 가장 가치 있다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타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낯설어 보여도 이해해 보겠다는 겸손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보다 성숙한 홀로선 인격의 개인, 사회, 공동체가 되어 서로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번 학기는 많이 늦어져 5월 1일에 개강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온라인으로 강의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온라인 강의준비에 매일 허둥지둥 지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온라인 교육이 원래 정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지식과 경험 중에 나눌만한 것이 있었다면 애당초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여 온라인으로 널리 나누면 될 일이었다. 내 지식을 나누기 위해 꼭 오프라인의 만남이 지금처럼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초연결성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되 만남은 최소화 하는 것이 글로컬리제이션의 정신이다. 내 가르치는 일에도 그 정신을 일찍이 따르려 했더라면 기숙사로 강의실로 학생들을 불러 모으느라 높아진 대학 교육비를 반토막으로 만들 묘책을 벌써 찾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포스텍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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