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7)
국내 첫 신춘문예 등용작가 백신애 (하)

백신애

나라잃은 민족의 참상·빈곤 소재

소설 23편·수필 38편 시1편 남겨

글과 행동 같은 ‘文行不二’ 길 선택

△‘나의 어머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백신애는 1929년 1월,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하룻밤 꼬박 쓴 소설을 이종사촌 박계화의 이름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보냈다.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나의 어머니’의 주인공인 나는 마치 저자 백신애처럼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투영된 이 소설은 여성운동가인‘나’와 전근대적인 여성인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 학벌이나 문단인맥이 전혀 없는 경상도 영천의 무명 처녀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나의 어머니’는 수많은 남성 응모자를 물리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 나라 신춘문예 사상 첫 여성 당선자가 나온 것이다. 그 뒤 32세로 사망할 때까지 백신애는 나라 잃은 민족의 참상, 빈곤을 소재로 한 소설 23편, 수필 38편, 시 1편 등을 남겼다.

△결혼과 파경 중에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다

1930년 백신애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대학 예술과에 적을 두고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연극‘개’(체호프 작)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도 있으나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자 연극을 단념하고 문학에만 전념했다. 결혼할 것을 요구하는 아버지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터라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기에 여자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빨리 귀국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떨어졌다. 귀국해 보니 부산 모 해운회사 사장의 아들과 혼사를 잡아뒀다. 별 말 없이 부모를 안심시킨 다음날 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주 귀국한 것은 1932년 가을이었다. 귀국 후 은행원 이근채와 약혼을 하고 이듬해 봄에 대구 공회당에서 신식결혼식을 올렸다. 이근채는 상처하고 자녀를 데리고 재혼했다. 1934년에는 대구 과수원으로 남편과 함께 신혼집을 옮겼다.

 

백신애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백신애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이 시기 백신애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드디어 1934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단편 ‘꺼래이’를 신여성 1~2월호에 연재 발표하고, ‘적빈’도 개벽 12월호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다.

‘꺼래이’를 쓴 해 과수원 신혼집에서‘채색교’, ‘복선이’ , ‘악부자’등 작품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상경해 서울 삼천리사 초청 여류작가 좌담회에도 참여했다.

한해 전인 1935년 아버지 백내유가 사망하자 그들의 결혼생활도 파탄이 났다. 백신애 부부는 여러 가지로 맞지 않는데다가 남편의 주먹세례까지 더해져 결혼생활은 5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문학정신을 불살랐던 자유인, 재평가 서둘러야

1936년 소설가 현진건이 얽힌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나고, 총독부의 애국지사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전부터 애국부인단체와 인연을 맺고 있던 백신애와 좌파 성향의 백기호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급기야 총독부가 사상범 감찰을 위해 경성과 평양, 광주 등 7개 도시에 감찰소와 출장소를 설치하기로 해 민족독립을 꿈꾸던 사람들은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됐다.

백신애의 사상적 고향이었던 오빠 백기호는 정우회 발기인이었고, 사회주의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북풍파 대표로 참여했다가 조선공산당 2차 검거시 원산에서 체포됐다. 이때는 아버지가 힘으로 빼냈다. 친일파가 아니고는 부를 축적할 수 없다는 논리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던 백신애의 아버지는 과수원을 하면서 일본, 중국으로 실어내던 나무 사과상자의 속을 교묘히 파내고, 금붙이를 넣어서 만주로 독립군자금을 부쳤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남매도 점점 심해지는 왜경의 눈을 피해 상해로 숨어들었다. 비록 왜경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소설가 강로향과 교류하며 40일을 자유롭게 방랑한 백신애는 오빠의 손에 이끌려 귀국했다.

 

백신애 마지막 유품.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백신애 마지막 유품.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결혼 전부터 위장이 나빠 죽을 자주 먹던 백신애는 이혼 무렵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새로운 각오로 문학을 하려고 서울로 갔을 때는 얼굴이 바짝 야위었다. 그런 가운데도 잡지사 여기자를 하면서는 문우들과 어울려 자주 술을 마셨다. 1939년 몸져누웠고, 5월에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백신애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6월 25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있던 1930년대 초에 작품을 시작해 30년대 말에 떠난 백신애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그는 결코 시대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빛나는 정신의 소유자다. 인간을 향해 결코 식지 않는 정열과 정의감을 보여줬던 백신애는 우리나라 첫 신춘문예 등단 여류작가이자 결코 일제 앞에 무릎꿇지 않은 비친일 여류 3총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백신애는 모순과 비리에 찬 현실을 주시하고, 식민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무지와 궁핍한 삶을 진솔하게 다뤘다. 때로는 작품 속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했다. 기름진 고향들을 빼앗겨 시베리아·만주로 떠도는 겨레의 참상을 다루기도 하고, 압박을 당하면 굴종하기보다 분연히 털고 일어서기를 촉구하는 특강을 다니기도 했다. ‘조선 독립’ , ‘대한민국 해방’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우리들의 고도를 향해 여성운동과 문학운동을 동시에 편 백신애는 육체적 고행과 외부적 핍박을 뛰어넘어 자유를 추구해 나갔다. 문학과 행동이 결코 둘이지 않는 문행불이(文行不二)의 길을 고고하게 걸어간 우리 문단사의 소중한 존재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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