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逆鱗)의 주인공들
영화 역린(逆鱗)의 주인공들
  • 등록일 2020.01.21 18:26
  • 게재일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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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유역변(丁酉逆變)과 홍상범(洪相範)

영화 <역린>의 촬영지에 있는 존현각 세트. 전남 담양군에 있는 이 세트장 담장에는 주인공들의 사진이 아직도 붙어있어 기억을 새롭게 한다.
영화 <역린>의 촬영지에 있는 존현각 세트. 전남 담양군에 있는 이 세트장 담장에는 주인공들의 사진이 아직도 붙어있어 기억을 새롭게 한다.

‘정조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정유역변은 1777년 정유년에 있었던 반역 사건을 일컫는다. 홍지해(洪趾海)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홍상범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하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경상도 장기현을 비껴나갈 수는 없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 홍상범의 처 정희순(鄭喜順)이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관노가 되었던 것이다. 한때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누렸던 ‘역린(逆鱗)’은 자객이 왕의 거처인 경희궁 존현각에 침투했던 이 실화를 배경으로 픽션을 곁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건의 기원은 홍상범의 할아버지인 홍계희(洪啓禧)에게서 비롯된다. 홍계희 부인은 영조 때 노론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의 조카였다. 때문에 홍계희는 1762년 임오화변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홍인한과 처삼촌인 김상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 중 한 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홍계희는 각 조의 판서 등을 두루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운 좋게도 정조가 즉위하기 5년 전인 1771년(영조 47)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까지 제수하였다.

홍계희에게는 형조판서를 지낸 홍지해,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홍술해, 지제교를 지낸 홍경해, 선공감 감역을 지낸 홍염해, 진사 홍찬해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들 뿐 아니라 홍상간을 비롯한 손자들까지도 모두 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집안의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노선을 따라 홍인한·정후겸 등과 더불어 정조의 즉위를 극구 반대하는 무리에 앞장섰다. 이게 집안의 화를 불러왔다.

 

홍계희의 묘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산리에 있다. 죽은 뒤 문간이라 시호되었으나, 정조 즉위 후 후손들의 정조 시해미수 사건으로 일가가 처형당하자, 그도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홍계희의 묘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일산리에 있다. 죽은 뒤 문간이라 시호되었으나, 정조 즉위 후 후손들의 정조 시해미수 사건으로 일가가 처형당하자, 그도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1776년, 25세의 나이에 정조가 즉위했다. 즉위하자말자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이무렵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재직 중이던 윤약연(尹若淵)이 임금의 하교에 따라 홍인한 일당의 상소들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때 윤약연은 대역죄인으로 판정되었던 홍인한의 편을 들어 그를 충신으로 묘사해서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정조는 이를 보고 진노하여 ‘대역죄인을 비호한다’는 죄목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보내 버렸다. 이들 무리와 같이 사사건건 정조를 비방했던 홍상간도 ‘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로 잡혀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홍상간의 아버지 홍지해도 아들 사건에 연관되어 국문을 받고 귀양을 갔다. 홍상간의 삼촌이자 홍지해의 동생인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홍술해에게는 장전(臟錢 옳지 못한 짓으로 얻은 돈) 4만 냥에 대한 혐의와 조(租) 2500석, 소나무 260주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를 적용해 흑산도에 위리안치시켜버렸다. 그야말로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남양 홍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이에 홍계희의 후손들은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이 일에 홍지해의 아들 홍상범이 앞장섰다. 그는 천민출신 장사꾼 전흥문(田興文)을 포섭했다. 전흥문은 궁성호위군관 강용휘를 끌어들여 20여 명의 무사들을 준비했다.

1777년 7월 28일, 드디어 홍상범은 암살단을 궁중에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강용휘의 조카)과 궁중 나인 강월혜(강용휘의 딸)의 길 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강용휘와 전흥문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잠든 정조를 살해하는 게 그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정조가 호위내관들을 불렀지만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객들은 낌새를 채고 달아났다. 호위병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보니 기와가 뜯겨지고 자갈·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숙위(宿衛 경호) 군사가 대궐 담장과 금중(禁中 궁궐) 수색에 나섰으나 어두운 밤이었고 수풀이 무성해 범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새벽, 정조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신들에게 경비가 허술함을 꾸짖으면서 비상 경호 대책을 수립하게 했다.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내시부에 속한 하인들 중에서 근본이 불분명한 인물들을 교체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엿새 동안 도성문을 닫고 수색하였으나 끝내 범인들을 잡지 못했다.


정조는 존현각이 너무 노출돼 있어 경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속명의록. 이 책은 정조 즉위초 홍상범(洪相範) 등의 역모사건을 1777년 7월부터 1778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사건의 처결사항을 상술(詳述)한 다음 정신(庭臣)들의 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이다.  당시 정조의 즉위를 둘러싼 왕실과 외척 사이의 암투와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속명의록. 이 책은 정조 즉위초 홍상범(洪相範) 등의 역모사건을 1777년 7월부터 1778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사건의 처결사항을 상술(詳述)한 다음 정신(庭臣)들의 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이다. 당시 정조의 즉위를 둘러싼 왕실과 외척 사이의 암투와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1777년 8월 11일 밤이었다. 정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포군(守鋪軍)이 잠든 것을 확인한 한 무리가 창덕궁 서문(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으려다가 마침 문을 지키던 군사 김춘득(金春得) 등에게 붙잡혔다. 특별경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대담하게 다시 대궐 담을 넘던 사람은 바로 십 수 일 전 존현각으로 침입했던 그 전흥문이었다.

정조가 전흥문을 친국한 결과 그 배후가 드러났다. 바로 홍상범이 주범이었고, 그 뒤에는 흑산도에 유배가 있던 아버지 홍술해가 있었다. 홍술해의 종 최세복이 서울과 흑산도를 오가며 홍술해의 지시를 전달했던 것이다. 이들은 최세복을 배설방 고지기로 삼아 도승지 홍국영을 제거하고 정조까지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배설방은 궁중 행사 때 여러가지 기구를 설치하는 관청으로 배설방 고지기는 궁궐 편전(便殿) 앞 차비문(差備門)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이때 기회를 봐서 자객들이 정조를 시해하기로 작전을 짰던 것이다.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집안의 또 다른 추가 역모사실이 함께 발각되었다. 홍상범의 어머니인 이효임(李孝任·홍술해의 부인)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녀 점방(占房)과 그 무녀의 남편 김흥조를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이효임은 홍술해가 귀양갈 때 부적(符籍)을 베개 속에 넣어 보낼 정도로 무속을 신봉했다고 한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무녀는 오방(五方)의 우물물과 홍국영의 집 우물물을 구해 홍술해 집 우물물과 섞어 한 그릇으로 만든 다음,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쏟았다.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함이었다. 홍국영이 대상이 된 이유는 홍국영이 정조를 목숨을 걸고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녀 점방은 붉은 안료(朱砂)로 정조와 홍국영의 화상(畵像)을 그렸다. 이들은 쑥대화살에 그 두 화상을 얽어매고 공중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홍국영의 집에는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과 연관된 또 다른 사실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홍계희의 8촌에 해당하는 홍계능(洪啓能)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 이찬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홍상길은 예문관 청지기 이기동(李奇同)의 친족 나인인 궁비(宮婢) 이영단(李永丹)을 시켜 한밤중에 정조의 침실에 들어가 살해하려고 계획했다. 여기에는 내시 안국래(安國來)도 관련됐다. 국왕의 호위군관부터 궁중의 나인·내시까지 임금을 보호해야 하는 모든 직책의 궁인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이런 홍계희 후손들의 역모사건은 한 달간 국문을 한 결과 정리가 되었다. 1777년 8월 14일, 홍상범은 광진(廣津)에서 책형(磔刑)으로 처단되었다. 책형은 시체를 저자에서 찢어 죽이는 형벌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홍계능도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홍필해는 장형을 맞아 죽고,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 조종한 홍술해·홍지해·홍찬해 형제 등은 능지처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홍씨 가문으로 처형된 주동자가 23명이나 된다고 한다. 은전군 이찬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미 죽고 없는 홍상범의 할아버지 홍계희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들의 가족과 친척들도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는데, 이때 홍상범의 처 정희순이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長䰇縣)의 노비가 되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희순이 장기현으로 옴으로 인해 이 가문은 2대에 걸쳐 장기현에 유배당하는 기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아시다시피, 임오화변 때 홍문관 교리로 있던 홍지해가 화를 입고 1762년 윤 5월 14일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사실이 있었다. 홍지해는 바로 희순의 시아버지였다. 불행하게도 희순은 장기에 도착한 이튿날 자살하였다. 어제까지 양반집 젊은 규수로 있다가 극변(極邊) 연해(沿海)고을의 관노비로 전락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겠는가. 희순은 동래 정씨이고 1748년(甲戌)생이라고 한다. 장기에 유배올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의 친딸이라는 것이다. 정존겸은 1776년(정조 즉위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사건 당시에는 좌의정으로 있었다. 아버지가 현직 좌의정이었지만 딸이 역적의 연좌인으로 몰려 노비로 전락되고, 유배지에서 자결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08년(융희2년) 9월에 전라북도 장수군 수남면 용계리에 살고 있던 홍술해의 6대손은 정유역변에 희생된 정희순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실린 이 청원서를 읽어보면 파란만장했던 이 집안의 삶이 마치 한편의 영화인 양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가 사라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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