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우거지

우거지와 시래기 국밥.
우거지와 시래기 국밥.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한다. 우거지와 시래기는 전혀 다르다. 시인이자 정치인 도종환의 시가 있다. 제목은 ‘시래기’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중략)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중략)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후략)

 

무청시래기 삶은 것.
무청시래기 삶은 것.

이 시에서도 우거지와 시래기는 혼란스럽다. 우거지와 시래기를 뒤섞었다.

우거지는 ‘웃걷이’ ‘웃거지’에서 시작된 말이다. ‘윗부분에 있었던 것’이 우거지다. 식물의 바깥 혹은 웃자란 부분이 바로 우거지다. 배추를 벗기면 겉껍질이 생긴다. 우거지다. 배추의 바깥 부분, 낡아서 버리는 부분이다. 정확하게는 ‘배추 우거지’다. 갓의 바깥 부분, 윗부분도 덜어내면 ‘갓 우거지’다. 다른 식재료도 마찬가지. 무청의 윗동은 무청 우거지다. 말리면 ‘무청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무청 시래기’라 부른다.

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가장 오래 낡아간 것,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것이 바로 우거지다. 우거지를 기억하는 손에 의해서 거두어져, 서리 맞고, 눈 맞으며, 겨울을 지나면, 시래기가 된다. 우거지를 말린 시래기다. 우거지 시래기다. 정확하게는,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우거지는 생물(生物)이다. 시래기는 겨울을 나면서, 말리고 발효시킨 것이다.

한국인에게, 시래기는, 가난이자 고향이다. 시래기를 보면, 누구나 가난한 시절과 떠나온 고향을 떠올린다.

나물과 말린 나물은 한식의 특질 중 하나다. 수도 헤아릴 수없이 많은 들나물, 산나물을 두루 먹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여러 종류의 나물을 말려서 이듬해 햇나물이 나올 때까지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겨울이면 무청, 배추 우거지를 말리고, 주요한 식재료로 사용하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나물, 묵나물, 시래기, 우거지는 한국의 주요한 식재료이자 음식 문화의 특질이다.

한국만 묵나물을 먹지는 않았다. 냉장, 냉동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건조, 염장, 발효 등이 식재료 보관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나물을 간장, 된장, 소금 등으로 절인다. 된장이나 김치 등은 발효를 통한 보관 방법이다. 말리는 것도 마찬가지. 주요한 보관 방법이었다.

 

배추 우거지 등으로 만든 밥상. 소박하지만 한국의 일상적인 밥상이다.
배추 우거지 등으로 만든 밥상. 소박하지만 한국의 일상적인 밥상이다.

중국도, 오래전에는, 말린 나물, 묵나물을 사용했다.

‘BAIDU[百度]’는 중국 검색 엔진이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 바이두 사전[百度百科, 백도백과]라고 부른다. 바이두에서 ‘旨蓄(지축)’을 설명한다. “旨蓄: 貯藏的美好食品(저장적 미호식품)”. “지축: 저장한 맛있는 식품”이라는 뜻이다. 건조식품 중 특별히 ‘채소, 푸성귀[菜]’ 말린 것을 이른다. 넓은 의미에서 시래기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고, 또 지금도 있지만, 우리처럼 무청 시래기, 배추 우거지 시래기를 널리 먹지 않았다.

‘성호전집_권 53_가포정기(稼圃亭記)’에 ‘지축’이 있다.

농사일하는 자가 채소밭 일하는 자에게 묻기를, “밭일에도 도가 있는가?” 하니, 밭일하는 자가 말하기를, “있다. 곡식이 있으면 채소가 있으니, 농사가 있으면 밭이 있는 법이다. 품종을 가려서 모종하고 시기를 기다려서 물을 주고, 뿌리가 있는 것은 흙을 북돋아 주고 덩굴을 뻗는 것은 뻗을 길을 내주며, 잎이 자라는 것은 물을 듬뿍 주고 열매가 있는 것은 길러 준다. 앞에는 가천(嘉薦)이 있고 뒤에는 지축(旨蓄)이 있으며, 크든 작든 빠르든 느리든 각각 그 능력대로 올려서 제향을 올리는데, 채마밭이 아니면 그 제수할 물건을 채울 수 없고 맛난 고기라 할지라도 채마밭이 아니면 그 맛을 더할 수 없으니, 이로써 말하자면 오직 밭일이 공이 있다.” 하였다.

 

여러 종류의 우거지, 시래기가 있는 밥상.
여러 종류의 우거지, 시래기가 있는 밥상.

좋은 것과 부족한 것을 두루 설명한다. 농사일은 채소밭 일보다 앞선다. 채소 기르는 농사로 여기지 않았다. 곡식이 채소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가천(嘉薦)은 제품(祭品)이다. 제사에 쓰는 음식, 식재료다. 고기는 늘 채소보다 앞선다. 채소는 보완재다. 고기보다 뒤처지지만, 소중하다. 채소가 없으면 고기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지축은 고기보다 뒤처지고, 채소 중에서도 뒷자리지만, 소중하다.

조선 전기 문신 허백당 성현(1439~1504년)의 시에도 ‘지축’이 있다. ‘허백당집_신춘 2수’의 내용이다. 새봄이니 묵은 나물, 시래기, 지축과 더불어 햇나물을 이야기한다.

(전략)//겨울 넘긴 묵은 나물[旨蓄] 먹기가 괴로우니/병든 입에 깔끄러워 뱉으려다 삼키누나/봄이 오자 연한 햇나물 먹고파서/묵은 땅을 일구어서 순무 뿌리 심어 보네

겨울을 넘긴 묵나물은 아무래도 햇나물보다 맛이 덜하다. 겨우 내내 묵나물을 먹었으니 이젠 몸이 햇나물을 원한다. 몸보다 입이다. 입이 햇나물을 원하니 순무 뿌리라도 심는다. 묵나물, 시래기는 예전에도 가난의 대명사였다.

조선 중기 문신 오음 윤두수(1533~1601년)의 ‘오음잡설’에서는 ‘산나물 시래기’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기고봉의 서실(書室)이 호현방(好賢坊) 골목에 있었는데, 일찍이 봄철에 종을 보내어 용문산의 산나물을 뜯어다가 뜰에서 말려 월동 준비를 하였으니, 즉 ‘시경’에 이른바, ‘내 아름다운 나물을 저축한다[我有旨蓄, 아유지축]’는 뜻이니, 그가 향리에 있을 때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호현방은 회현방으로, 지금의 서울 회현동이 있는 충무로 일대다. 기고봉은 기대승(1527~1572년)이다. 고봉은 호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 ‘이기 논쟁’을 벌인 조선 중기의 큰 성리학자다. 그의 서실이 호현방에 있었다. 고봉은, 한양에 살면서 봄철이면 사람을 보내 용문산의 산나물을 채취하고 말렸다.

“我有旨蓄(아유지축)”은 중국 고전에서 비롯된 문장이다. “나에게 맛있는 묵나물이 있다”는 뜻이다. ‘지(旨)’는 아름다운 음식, 맛있는 음식이다. ‘축(蓄)’은 모은다, 비축한다, 저축한다는 뜻이다. 잘 모아둔 맛있는 음식, 결국 말려서 겨울을 나는 산나물, 들나물 등이다. 용문산에서 뜯어말렸으니, 고봉의 지축은 산나물 시래기다.

위의 시는 고봉의 검약한 삶을 잘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으로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1487년) 9월11일’의 기사다. 음력 9월이니 10월, 11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제목은 ‘양양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연잎밥과 더불어 내놓은 우거지국.
연잎밥과 더불어 내놓은 우거지국.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중략)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후략)

강원도는 곡식이 귀하다. 가을이면 지축, 도토리 등을 모으고 준비해야 한다. 강무는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강무가 있으면, 인근 주민들은 행사에 동원된다. 길을 닦고, 식사 준비, 말 먹이 등도 챙겨야 한다. 가을에 강무가 있으면 백성들이 겨울 준비를 하지 못한다. 강원도 양양도호부사 유자한은 강무 연기를 말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주로 먹던 지축을 우리는 꾸준히 발전시켰다. 오늘날 산나물 시래기, 즉 묵나물이 바로 지축이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지축’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만 정작 시래기 음식은 버렸다. 우리도 시래기는 가난의 대명사로 여겼지만 늦가을, 초겨울이면 집집마다 시래기를 챙긴다. 사시사철 나물이 흔하니, 필요할 때마다 슈퍼나 마트에서 매번 챙긴다. 특정 지방에서는 시래기를 지역 특산물로 홍보한다. 아름다운 우리의 지축, 시래기 문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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