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장기유배

우암의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이 은행나무인 것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원목은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난 손자나무가 다시 자라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암의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이 은행나무인 것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원목은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난 손자나무가 다시 자라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암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람마다 호불호의 견해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이렇듯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우암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은 1675년 6월 10일이었다. 그는 약 4년간 이곳 마현리에 머물면서 장기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다가 갔다. 가도 그냥 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국노거유(國老巨儒)답게 장기사람에게 그의 사상과 철학들을 한 움큼 심어놓고 갔다.

그런 면에서 우암의 장기현 유배는 지역민들로 봐서는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었다. 아니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전체에도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근고을에서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우암을 찾아와서 문안을 올렸고, 한양에서 아예 보따리를 싸서 내려온 선비들이 그에게 학업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던 사실들에서 이 같은 영향력의 실상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암이 장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674년(갑인년)에 일어났던 제 2차 예송(禮訟)논쟁이었다. ‘며느리인 왕비가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시어머니(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맞는가?’란 논쟁거리에 휘말려 장기까지 유배를 온 것이다.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사람은 인조이다. 소현·봉림·안평·용성대군을 낳은 인렬왕후 한씨가 죽자는 인조는 조대비(자의대비,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이때 인조의 나이는 마흔넷이었고, 조대비는 아들인 효종(봉림)보다도 다섯 살이나 아래인 열다섯이었다. 그러다보니 효종과 효종의 비(인선왕후) 두 사람이 다 죽을 때까지도 조대비가 살아 있는 특이한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는 신하가 보는 예법책과 왕족이 보는 예법책이 달랐다. 양반들은 <주자가례>에 적힌 예법을, 왕족은 <경국대전>을 따랐던 것이다. 문제는 경국대전에 조대비 같은 특이한 경우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첫 번째 논쟁(1차 예송논쟁)은 1659년(기해년)에 일어났다. 먼저 효종이 죽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의 상(喪)에 어머니(계모)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게 논점이었다. 원래 왕실의 예법대로 하자면 장남이 죽었을 때는 3년, 차남이 죽었을 때는 1년이었다. 그래서 조대비는 이미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서인인 송시열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살아있는 부모는 장자의 경우 3년, 차남 이하는 1년간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도 결국 사대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같은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하이지만 세력을 얻은 서인들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이들과 견해가 달랐다. 효종이 비록 차남이긴 하지만, 결국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왕이니까 주자가례가 아니라 특별한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주인 현종의 입장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을 맏아들로 대접하지 않겠다는 건, 정당하게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아들인 현종 자신도 정당하지 못한 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이었던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서인과 등을 돌릴 수도 없을 뿐더러, 싸움이 너무 길어질 경우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송시열, 송준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우암이 장기로 유배온 계기를 만든 두 번째 논쟁(2차 예송논쟁)은 1674년(갑인년)에 일어났다. 이제는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었다.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시어머니 조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지를 놓고 또 논쟁이 벌어졌다. 주자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효종이 임금이 되었으므로 인선왕후도 당연히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동안 15년이나 왕위에 머무르면서 정치에 노련해진 현종은 더 이상 서인들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것이다.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윤휴, 허목)들이 권력을 잡았다. 반면 세력에서 밀려난 서인의 대표 송시열은 쫓겨나 포항 장기로 귀양을 오게 된 것이다.

예송논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왕실의 예절을 따지는 소모적인 다툼처럼 보였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다. 이것은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와 신하들 간의 정치적인 대립이 얽히면서, 숙종 때에 와서는 더 큰 다툼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암이 장기에 위리안치된 이후, 인근 고을의 수많은 사람들과 중앙의 우암 인맥들이 장기를 찾아왔다. 1676년 2월 3일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도 왔다갔다. 윤증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유명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장기현을 방문한 후 노론과 소론이 분화되고 그가 소론의 거두가 된 탓이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행장에 이미 다 잘 나와 있다.’ 고 기피하면서 무성의하고 비판적인 내용으로 묘갈명을 지어줬다. 그리고 묘갈명 끝에다 술이부작(述而不作·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탐탁하지 않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때 스승이던 송시열이 부친의 묘갈명을 대충 지어주자 아쉬움이 남았던 윤증은 송시열이 장기에 있을 때인 병진년(1676년) 2월 28일, 추풍령을 넘어 장기까지 찾아와서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이것마저 거절했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경전주해(經傳註解) 문제로 윤휴(尹鑴)라는 사람과 사이가 나빠졌다.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그런데 윤선거는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었기에 사사건건 윤휴의 편을 들면서 그를 두둔했다. 이 일로 송시열과 윤선거의 사이마저도 비틀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다른 선비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약속하고도, 어머니와 함께 평복을 입고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27세의 윤선거의 판단과 동기는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 그것이 그때 조선을 지배하던 이른바 ‘의리’와 ‘명분’에 어긋났다는 사실은 뚜렷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우암도 그를 의리가 없고 불충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했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이어졌고, 끝내는 노론과 소론의 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갈라진 이유가 윤증이 장기에 있는 우암을 만나고 간 이후부터였다고 하니, 조선 후기 정치사의 소용돌이 속에 장기현이 있었던 것이다.

인근 수령들도 장기에 있던 우암을 배알하였다. 1679년 당시 영천군수로 있던 이사영(李思永)은 매월 우암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다가 이것이 문제되어 파직당하기도 했다. 장기 주민들과 우암의 접촉도 관심을 끈다. 어느 늦은 봄날 인근 주민이 살아있는 암꿩 한 마리를 잡아와서 우암에게 주었다. 우암은 여러 번 꿩을 어루만지다가 그 사람에게, “교미를 하고 새끼를 칠 때인 만큼 알을 품고 있는 금조(禽鳥)를 죽일 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꿩을 되돌려 주었다. 꿩을 다시 받은 주민은 숲 속에 그 꿩을 놓아주었다. 얼마 후 그 암꿩이 새끼들을 거느리고 산간을 나다니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는 우암의 인품이 숲속의 새들에게까지 자비로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와 곁들여 우암이 학질병까지 낫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고도 한다. 장기는 남방이기 때문에 학질이 많았는데, 주민 중에 이 병에 걸린 자가 고통을 참지 못하다가 우암의 적거지 가시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병이 나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암이 떠나간 후에도 장기사람들은 학질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송대감(宋大監)’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서 등에 붙이면 즉시 병이 치유되었다고 했다. 이는 우암이 장기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글자를 써서 붙였다고 해서 병이 나을 까닭이 없다. 비록 장기로 유배를 온 신분이었지만, 학질이 물러날 만큼 우암이 위엄 있었고 무서운 존재로 부각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우암이 장기에 유배된 이후부터 지방의 풍속이 크게 변화된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새해의 차례를 섣달 그믐날에 행하던 풍속을 우암이 바로잡아 ‘설날(元日)’에 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설날(元日)은 응당 해가 뜬 이후부터이니, 아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절에 맞는다는 것이다.

우암은 장기 유배 생활 중에서도 학문을 계속하였다. 찾아오는 전국의 문인들에게 강학하였으며, 때로는 지역민을 모아 가르쳤다. 우암이 머물던 집의 주인인 오도전은 4년간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다. 장기사람 서유원과 이동철 등도 꾸준히 문하에 출입한 문인이었다. 이들은 후일 죽림서원을 창건하고 그 역사를 고증하는 일에 한몫을 하였다.

우암 사적비. 장기초등학교 내에 있다. 장기현은 우암으로 인해 황량한 변방의 범속한 풍속이 바뀌어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현(儒賢)의 고을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우암 사적비. 장기초등학교 내에 있다. 장기현은 우암으로 인해 황량한 변방의 범속한 풍속이 바뀌어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현(儒賢)의 고을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우암은 대략 222제 297수의 시를 유배지 장기에서 창작했다. 이 시들을 통하여 우암은 다양한 심회를 시로 형상화했다. 또 <주자대전차의>와 <정서분류>는 장기 유배기간 동안에 저술된 대표적인 학술서이다. 이것 외에도 장기에서 지은 <문충공포은정선생신도비문>과 전 장기현감 이수일의 묘갈명이 전한다.

우암은 1679년 4월 10일 장기를 떠났다. 우암이 처음 장기로 왔을 때부터 적거지 안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스스로 싹을 틔웠다. 거제도로 이배될 시점에 그 나무는 제법 자랐다. 우암은 그것을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竹轎·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올라서 떠나갔다. 오도전 등 장기 제자들 일부는 선생의 가재도구를 챙겨서 짊어지고 거제도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남은 제자들은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나는 스승을 만감에 젖어서 전송했다. 우암에게 배운 장기 선비들이 얼마나 스승에게 감사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340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장기 땅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심은 은행나무가 늙어서 죽고 아들나무가 생겨났다가 또 죽고, 이제는 그 뿌리에서 생겨난 손자나무가 그때의 사실들을 이야기 한다. 설령 이 은행나무가 죽고 또 죽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우암의 회상들은 여기 장기 땅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