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물 반 정어리 반이었지.

지역의 한 원로는 일제강점기 포항을 회고하다가 포항 앞바다에 정어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며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정어리는 기름이 많은 생선이어서 기름을 짜내 산업용이나 군사용으로 많이 썼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임진왜란 때면 모를까, 생선 기름을 근대의 대규모 전쟁에 썼다는 얘기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고 한동안 잊어버렸다.

한 학자의 소개로 근래 이기복의 논문을 읽고 난 후 망각의 바다 저편으로 사라졌던 정어리는 암청색 몸을 빛내며 뇌리속으로 들어왔다. ‘경상북도수산진흥공진회(1935년)와 경북 수산업의 동향’(《역사와 경계》 2009년 12월)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공진회(共進會)는 품평을 겸한 박람회를 뜻한다. 이 논문은 1935년 당시 수산업을 중심으로 포항에서 전개되는 역동적인 상황을 묘파하고 있다.

“10일간 열린 이 수산공진회는 출품인원 1천884명(3천46점), 관람인원 5만9천642명으로 포항 전역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박람회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1935년 경상북도수산진흥공진회는‘수산’이라는 산업적 주제, ‘포항’이라는 지역적 제한성 때문에 연구사적으로 간과되거나 무시되었다. 필자는 그 산업적 주제, 지역적 제한성이 역설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문의 머리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대체 1935년 포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35년에 이르러 수산제조품 수요가 급증해 일본 당국은 산업적인 대응이 필요했고, 이를 배경으로 일본인들의 주도로 대규모 공진회가 개최된 것이다. 당연히 일본인들의 잔치가 된 공진회의 수상품 목록을 보면, 식용으로 청어와 고등어, 비식용으로 정어리 기름과 비료가 다수를 차지했고, 통조림 제조 등에 큰 비중을 두었다. 특히 이 수산제조품은 일본·만주 등으로 보내기에 유리했다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요컨대 경북수산공진회는 포항을 중심으로 경북지역 수산물의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렸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원로의 얘기에 머리를 끄덕였다. 20세기 초반 정어리 기름은 산업용, 군사용으로 폭넓게 활용됐다. 특히 세계대전의 주범인 일본과 독일에게 정어리 기름은 아주 요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고의 정어리 어획량을 자랑하던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은 막대한 양의 노르웨이산 정어리를 군용 통조림과 군수용 기름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동해안에서 풍년을 이뤘던 정어리도 노르웨이산 정어리와 같은 운명이었다. 포항과 교류가 많았던 함경북도 청진이 정어리의 대량 어획과 가공을 기반으로 1944년 인구(18만4천여 명) 규모에서 조선 4위의 도시로 팽창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 동해는 일본의 내해(內海)였고, 식민의 바다였다. 호미곶등대를 포함해 일제강점기 한반도 연안에 점점이 세워진 등대는 일본이 바다를 무대로 수탈을 손쉽게 하기 위한 식민지배의 인프라이다. 조선사람의 운명처럼 동해안의 어류도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정어리처럼 활용도가 높은 어류는 남획을 피할 수 없었고, 독도 강치의 멸종은 그 극적인 사례다.

포항은 한적한 어촌이었다가 제철공장이 들어오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간혹 듣는다. 일면의 사실일 뿐, 포항 역사의 깊이를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비록 수탈의 아픈 역사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바다를 배경으로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생생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넓은 들판과 산맥, 형산강과 영일만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얘기가 펼쳐지는 천일야화의 지역이 포항이다. 시 승격 70주년, 그 빛나는 구슬과 옥을 솜씨 있게 꿰는 안목과 정성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