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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역사이야기

김정호 기자
등록일 2006-04-14 17:30 게재일 200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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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 월포만 바라보며 엎드린 자라 같아

청하 월포만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유서 깊은 마을이 있어 오두리다.

자라 鰲(오)자와 머리 頭(두)자를 써서 ‘자라머리마을’, 곧 오두리다.

한풍 거친 엄동설한에도 이 부근에 이르면 바람도 잠잠하고 유난히 따스하다 느껴지는 곳이다.

이 마을은 한 덩이의 섬 같은 야산이다.

그 형국이 자라 같은데 머리부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있어 오두리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이 마을 앞에 솟구친 용산 머리에 올라 이 마을을 내려다보면 흡사 자라가 엎딘 형세다.

선사시대 이후 신라가 제대로 나라를 형성할 때 까지 이 곳에 토성이 있었다 하여 인근 주민들 까지도 이 야산덩이를 江城山(강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조 중반기가 지나도록 이 마을은 12개의 우물이 있는 큰 마을이었으며, 이 마을의 서당이 청하 고을에서 가장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오두 출신 三星(3성)이 있으니 오암대사와 효우 이원랑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청하 인근에 학봉 김성일의 혈족이 상당수 살았던 것으로 보아 어린 시절 한때 유학을 하듯 이 마을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였을 것이라 사료된다.

효우 이원랑은 뒷마을인 필화리에서 태어나 청하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6대조 할아버지로서 학문과 덕성이 특출한 선비였다고 한다.

특히 자기 형이 몹쓸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것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던 차 어느 날 청하 향교에 들렀다 귀가하는 길에 희귀한 뱀인 백사가 나타나 길을 막는지라 진즉 자기 형의 병에 특효라는 것을 알고 도포자락에 몰아넣으니 뱀이 스스로 담아드는 지라 이를 자기 형에게 복용케 하여 병을 치유하였다고 한다.

지극한 형제사랑의 우의가 하늘을 감복케 한 기적이라 하여 인근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니 마침내 조정에 알려져 孝友閭(효우려)를 내리며 포상했다 전해지고 있다.

오암대사는 김준씨의 아들로서 그는 숙종 36년[서기 1710]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83세를 일기로 大師(대사)의 반열에 올랐던 고승으로서 숱한 詩文(시문)을 남긴 학문승이다.

그의 조부 김석경은 해남현감을 지냈으며, 낙향하여 송라면 보경사 어귀 학산마을에 서원을 짓고 후학교육에 전념하기도 하였던 선비요 토호였다.

그의 아버지는 의술에 능하였는데 정승 반열 이씨집안의 딸이 공개하기 부끄러운 지병으로 고뇌에 빠져 있는 것을 은밀히 치유하여 살게 하니 그 여인이 기어코 그의 첩이라도 되어 사는 것이 은혜를 갚는 길이라 고집해 마침내 잉태하여 태어나게 된 영제라 전해진다.

2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는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금강산의 유점사로 들어가 義旻(의민)이라는 법명을 받아 승려의 길로 접어들었다.

학문이 특출한 그는 서산대사의 9세손이 되어 만년에 보경사로 들어와 시작과 제자 가르침에 몰두하다가 83세 때 ‘형상이 본디 거짓인데/ 그림자가 어찌 참것이 되랴/ 형상 있는 것은 참형상이 아니요/ 몸을 여의고 보면 곧 참 몸이로다 / 그 온 곳을 형상하기 어려우며 / 가는 곳을 찾아도 원인이 없도다./ 오고 간 것을 인정하지 못할 적에 / 비로소 참 자기를 보리라’ 는 진영송과 ‘오늘아침에 한 꿈을 깨고 보니 / 어느 곳에 새 얼굴을 바꾸리 / 오랫동안 보리의 원을 맺었으니 / 당연히 법왕가에 태어나리라’ 는 임종게(臨終偈)를 쓰고나서 소연히 열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오묘하게도 그분의 서거 212년후에 다시금 대 학문승을 이어내리니, 청하출신 이지관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는 경사가 있기도 했다.

하루는 법당에서 끼니를 잊은 채 땀에 흠뻑 젖도록 용을 쓰고 앉아 염불에 몰두하는지라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 시간에 당신은 양산 통도사에 난 불을 염력으로 끄느라 그러셨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수백수의 시를 모은 오암집이 있어 흥해의 명 문장가 최천익 진사와의 시짓기 내기시합으로 당대에 화젯거리를 모았던 이야기도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禪敎正使(선교정사)의 칭호를 받아 비에 새겨지니 그는 선(禪) 교(敎) 양종(兩宗)의 최고 지도자급 승려로 추앙 받은 분이다.

오두리는 이렇게 한 시대의 큰 인물들을 배출한 일등급 마을이었다.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연안 최고의 부촌이던 이 마을이 풀썩 망하게 된 그 속사연이 전해지고 있어 이 날의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한 허름한 도승이 이 마을로 시주를 청하러 왔다가 샘터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물을 깃고 빨래를 하면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는데, 허구한날 손님 치느라 일이 많아서 못살겠다는 팔자타령들이었다.

시주를 청하는 스님에게 반농 반 진담으로 “스님요, 우리 동네에 손님들 좀 적게 오도록 할 수 없능교? 우리 손님 치느라 천날 만날 밥하랴 빨래하랴 힘들어 못살겠니더. 우리 시주 많이 할 테니 그렇게만 좀 해줄 수 없겠닝교?

묵묵히 아낙네들의 투정을 듣던 그 스님은 이윽고 약조를 하고 만다.

그리고는 정과 망치를 갖고 오라하여 그것을 받아 들고서 이 마을 동편 하천 건너 치성바우인 자라바우로 가서 땅~땅~땅~ 머리를 뜯어내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합장을 하며 훌 훌 떠나가 버린다.

얼마 후 대 홍수가 나서 이 마을 앞을 흐르던 강이 범람하였고 물길이 바뀌면서 논밭전지가 폐허되고 연이어 흉년이 드니 가세들은 날로 기울어 마침내 나그네의 발길이 뚝 끊어지더라는 것이다.

그 이후 열 두 우물을 먹던 이 마을은 줄고 또 줄어들어서 지금은 겨우 12호가 남아서 한촌(閑村)으로 변해 있다.

우리는 이 구전 역사에서 몇 가지를 배운다.

번창한다는 것은 일이 많다는 뜻이요 가난하다는 것은 일이 적다는 뜻이라는 것과 여자들이 한 마을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징성은 유감주술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 마을상징바위를 파괴하는 것이 그토록 당대의 큰 인물들을 배출하던 名村(명촌)을 죽이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제 이 마을의 전설을 전해주며 한숨짓던 촌로들도 어느덧 다 사라지고 자라바위의 생명은 오암 큰스님의 시문집 속에 혼맥을 잇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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