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래곤 신부·침산본당 주임

찬미 예수님.

루카 복음16,19-31.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에 관한 비유를 들려줍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전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는 비싸고 좋은 옷도 주저하지 않는, 호화로운 식탁을 차리며 자신만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 이외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그래서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운 채 굶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돌볼 생각은 전혀 없는 부자입니다.

반면에 복음에 나오는 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의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아서 하느님만이 그를 기억하고 걱정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이 사람은 이름이 전해집니다. `엘레아자로`라는 이름의 축약형인 `라자로`는 그 뜻도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신다.” 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잊혀진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아무 가치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귀하디귀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고된 삶을 마친 뒤에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영원한 행복 안에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말씀하셨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

반면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때에는 후회해도 소용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는 너무 늦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모습에 따라 결정된다.`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셨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난해 9월 4일 시성되신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나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내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처럼 굶주린 이들과 헐벗은 이들과 머물 곳이 없이 떠도는 이들, 불구와 눈먼 이들과 나환자들,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이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짐이라 여겨지는 모든 이들을 주님처럼 섬기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애덕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