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매화향 가득 안고

▲ 조낭희수필가
▲ 조낭희수필가

선암사 찾아가는 길은 용기를 내야할 만큼 먼 초행길이지만 봄비가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설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선암매를 비롯하여 수백 년 된 매화 70여 그루가 자란다는 절, 나는 우중(雨中)에 고령(高齡)의 선암매와 마주하고 싶었다.

선암사는 신라 진평왕(542년) 때 아도 화상이 비로암 자리에 창건했지만 도선 국사가 지금의 터에 중창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절 서쪽에 10여 장이나 되는 큰 돌이 평평해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답게 깊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대가람이다.

늦게 찾아온 봄이 깨어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봄비 몇 방울이 듣다가 그친다. 부도밭을 지나고 보물 40호인 승선교를 만난다. 조선 숙종 때 호암 선사가 자연 암반 위에 축조한 무지개다리인 홍예교이다. 계곡과 나무, 물에 비친 강선루의 반영이 그림 같다. 이름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머물 만한 비경이 아치 안으로 펼쳐진다.

선암사는 사천왕문과 협시보살, 어간문이 없어서 삼무(三無)의 사찰로 유명하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지켜준다고 믿어 사천왕문을 만들지 않았으며, 대웅전의 석가모니부처님이 탐진치 삼독(탐욕, 화냄, 어리석음)을 멸하고 항마촉지인으로 마구니에게 항복받아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대웅전의 어간문은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출입할 수 있다하여 아예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누문을 거치면 만세루가 막아선다. 그로 인해 붉게 이우는 동백들과 인사를 나누며 돌아가는 느긋함을 배운다.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가람 배치가 마음에 든다. 만세루를 끼고 돌아서면 그제야 수수하고 전아한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세월로 단청이 벗겨져 담백하고 우아하다. 대웅전 앞을 지키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간결미를 더하고 뒤켠의 홍매화 한 그루가 고풍미를 뿜어낸다.

법당 안에는 주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홀로 모셔져 있다. 정성을 다해 삼 배를 올린다. 법당에 서면 한없이 작고 낮아지는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먼 길을 달려온 내가 부처님만큼 큰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부처를 만나는 날, 나는 모처럼 넉넉하게 불전을 올린다.

오래된 석축과 돌담, 섬세하게 꾸며놓은 정원을 감상하며 선암매를 찾아 나선다. 독특한 가람배치와 자연스럽고 소박한 짜임들, 전각들은 웅장하지 않으면서 자유분방한 듯 질서를 갖추고 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거나 각을 지어, 대칭과 비대칭을 반복한다. 그 사이로 길은 막힌 듯 트여 있다. 품격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선비다운 풍모가 느껴지는 사찰이다.

선암매를 찾아 기웃거리는데 한 무리의 사진작가들이 시끄럽다. 무우전 돌담길을 지키는 매화들이 일제히 펴서 눈이 부실만큼 화사하다. 원통전 돌담 뒤의 천연기념물 488호인 선암매는 노령의 기품을 유지한 채 몸 풀 날을 기다린다. `종정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무우전은 흑백사진 속의 고향집 같다. 아련한 추억 속의 돌담길을 배경으로 수십 그루의 매화들이 애간장을 녹인다. 운무의 흐느낌도 매화향기에 실려 고혹적이다. 다투듯 피어나는 애끓는 사랑, 선암사의 4월은 온통 열애 중이다.

늦은 사랑이 내게로 왔다/ 가장 늦은 사랑이 첫사랑이다/ 봄 여름 가을/ 꽃시절 다 놓치고/ 언 땅 위에서/ 나는 붉어졌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봄이라 하지만/ 꽃물을 길어올린 건/ 겨울이다 인색한 몇 올의/ 빛을 붙들어 온몸을 태운/ 한 그리움의 / 실성(失性)/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는가/ 지금 그리워해도 되는가/ 너는 묻지 않았으니/ 스스로 터져 봄날이 되는 사랑아/ 아직 얼어붙은 하늘에 뾰루퉁 입 내민/ 붉은 키스/ 가장 이른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상국의 `홍매`-

 

▲ 조낭희<br /><br />수필가

화심은 흐린 날씨마저 뜨겁게 달구고 뒷산의 운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킬 새라 가까이 다가서질 못하는데, 사진 작가들의 빗나간 예술혼이 씁쓸하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언행과 탐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저만치 물러서서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며 질펀한 매화향에 젖는다.

절절한 아름다움 속으로 파고드는 기습적인 전율,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부처님의 가피이리라.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손을 모으는 일, 그것뿐이었다. 선암사 부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황홀한 홍매화의 모습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때로는 운무 가득한 자연이 되어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 온기는 깊고 아늑하다.

가슴에 온전히 담아둘 수 없는 아쉬움을 접고, 시간에 쫓겨 선암사를 빠져나온다. 해마다 안개 낀 봄날이 오면 선암사가 그리워 한 차례 열병을 앓을 것만 같다. 의식이 성장하는 진통, 수백 번 앓아도 괜찮은, 그런 열병이라면 좋겠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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