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힘의 원천은 `철(鐵)`
포항 흥해지역의 목곽묘서 철제 농공구·무기류 다량 출토
철을 가지게 된 경로·만든 장소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아

철은 신소재였다. 당시로서는 하늘이내린 선물로 여겨질만했다. 청동기를 사용하던 고대인들에게 철은 강인하고 실용적인 측면 때문에 지배도구로서의 역할도 가능했다. 철기시대 초기에는 무른 재질의 운철을 사용했다. 기술의 발달로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들어 내면서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맞게 됐다. 이 시대의 철을 가진자는 철을 이용하여 무기와 농공구류를 만들어 세상을 지배했다. 철제품은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교역에 이용되기도 했다. 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 포항 대보면 대보리 95호 석곽묘 단야공구류(경북문화재연구원보고서에서).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과 고인돌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 포항 옥성리 나지구 65호 목곽묘 철물노출(영남문화재연구원 보고서에서).

한반도 제철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두차례정도 전래되었는데. 한국식동검문화를 기반으로 하던 BC 4-3세기경 중국 연나라 제철기술이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 때 한반도에서는 무기류, 의기류 등은 여전히 청동기로 만들고 있었지만, 농공구류는 신소재인 철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BC 2-1세기경의 전한(前漢) 말기에는 일시적으로 철전매제가 폐지되면서 제철기술이 다시 한번 한반도에 전래되었고, 이때부터 한반도의 철기사용이 보편화됐다.

한반도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전한 말 제철기술이 전래되는 시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때는 지금껏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던 것을 철제 농공구류와 함께 무기류도 단조철기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철기를 가진 자들은 철제 농공구류를 이용하여 목제농기구와 선박 등을 제작함으로써 농어업의 생산성도 높였다. 이러한 생산성을 배경으로 철을 가진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사회통합과정을 이루어갔고, 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해갔다.

□제철기술의 발달과 신라의 성장

제철기술의 발달은 국가형성과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와 교역에서 중심에 서기도 한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변진에서 철이 생산되어 마한, 동예, 왜가 와서 사가고, 낙랑과 대방에는 철을 공급하였다란 기사가 있다. 이것은 당시 변진한이 철을 주요 교역품목으로 할 만큼 대규모시설을 갖춘 지역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대규모시설이란 철광석을 녹이는 제련로를 비롯한 연료제작용 목탄가마, 철을 재가공하는 용해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단야로 등 여러시설중 상당부분의 시설을 갖춘 곳을 말한다.

현재까지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대규모 제철유적은 경주 황성동과 밀양 사촌리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밀양 사촌리 제철유적은 6-7세기경의 유적으로 철광산, 제련로, 목탄가마 등을 갖추고 철을 직접 생산하던 대규모시설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은 유구와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 선철을 녹이는 용해로, 주물, 단야로 등을 갖춘 또 다른 대규모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는 경주 인근인 황성동에서 철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지만, 울산 달천광산 등에서 1차 가공된 철을 가져와 완제품의 철기를 생산하던 대규모 제철시설이었다. 이러한 제철시설을 신라의 중심권 가까이에 둠으로써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신라의 동해안 진출이전의 정치적 상황

신라가 동해안 진출이전에 이 지역에는 울진 우중국(優中國), 영덕 우시산국(于尸山國), 포항 근기국(勤耆國) 외에 안강 읍즙벌국(音汁伐國), 삼척 실직곡국(悉直谷國) 등 문헌에 등장하는 소국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국들의 정치적 상황은 문헌과 고고자료의 태부족으로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다. 다만 AD 2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신광토성, 북미질부성, 남미질부성 등이 소국과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가 동해안 진출이전의 이 지역의 생활상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만한 자료로는 주거지, 무덤, 출토유물 등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 목관묘와 철물이 출토된 포항 북구 흥해 옹성리 지구 일대. 지금은 흥해읍 청사가 들어서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먼저 주거지는 울진 오산리에서 확인되었는데 땅을 파고 만든 네모난 집의 한쪽 벽을 따라서 형성된 쪽구들이 확인되었다. 쪽구들의 구조는 철을 가진자들이 철 생산에 사용된 고화도의 제철로 원리를 주거환경에 변용시켜서, 난방에 이용한 것이다. 또 무덤유적인 포항 흥해읍 옥성리, 마산리, 학천리, 성곡리 등에서 발굴된 자료를 보면. 땅을 파고 판자형 목곽을 설치한 후 내부에 토기와 철물, 장신구 등을 부장하던 목곽묘가 성행하고 있다. 목곽묘에는 다종다양한 철물이 묻혔는데 쇠도끼(철부)를 비롯한 농공구류와 쇠창(철모), 유자이기, 화살촉(철촉) 등과 같은 무기류가 함께 묻혔다. 이처럼 목곽묘의 주인공이 농공구류와 무기류를 같이 가지고 있다가 묘에 묻혔다는 사실은, 당시 철을 많이 가진 자가 지배자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동해안 지역은 원삼국시대 초기부터 철을 가진자가 세력을 떨치던 지역이라서 철을 가지는 열망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철과 철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경로로 그들이 철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주거지에서 제철과 관련된 고화도의 불을 이용한 점, 목곽묘의 다종다양한 철물이 묻힌 점 등은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곳은 철을 다룰 줄 알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후의 정치적 상황

신라의 동해안 진출은 소국 정벌과 함께 AD 3세기 경에는 고구려, 동예 등 북쪽의 이민족들과 영토분쟁을 벌리면서 정치적으로 급박한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4세기경 이후에는 삼척, 강릉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안정화를 이루면서 지역발전에 힘쓴 모습들이 울진 봉평비와 포항 냉수리, 중성리비 등 동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나타나고 있다.

신라가 동해안에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룬 증거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과거 이 지역의 수장을 지방 통치자로 임명하거나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있다. 그 결과가 울진 봉평리, 읍남리, 영덕 덕곡리, 괴시리, 포항 냉수리, 대련리 등의 대형무덤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묻힌 토기류, 철제유물 등도 중앙의 유물과 기형이나 재질면에서 유사성을 보임으로, 이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가 동해안 진출 이후에는 철기를 가진 자들이 유물의 기형과 질, 양적 면에서 중앙관리와 별차이가 없다. 그뿐 아니라 포항 대보면 대보리 95호 석곽의 단야공구인 집게, 망치, 모루 등은 이 지역에서도 자체철기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신라가 동해안 진출이후에 만든 소형무덤에서 조차 철기와 철기 제작도구가 출토되는 것을 보면, 철기문화가 보편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일련의 증거들이 당시 이 지역에서 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하여 제철에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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