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 6월 호국보훈의 달 맞아 ‘정보와 기록’ 의미 조명 왜적 침략 징후 속 노출된 정보 판단의 한계와 역사적 교훈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왜 15만 명이 넘는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 경로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명나라와 류큐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징후가 사전에 감지되고 있었음에도 비극을 막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학 자료 연구·보존 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임진왜란기 조선의 일본 정보 수집 과정과 전쟁 기록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류성룡의 ‘징비록’과 강항의 ‘간양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경험 속에서 정보의 부족과 정세 판단의 한계가 국가 방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문헌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해금 기조 등으로 인해 해외 정보를 얻을 경로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공식 사신 파견이나 최부 등 표류 귀환자의 진술, 쓰시마를 통한 루트가 전부였다. 1590년 경인통신사가 돌아온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예고는 조선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에 붙잡혀 있던 중국인 허의후의 제보로, 류큐는 세자를 명에 보내 소식을 전할 정도로 동아시아 전역에 침략 징후가 파악된 상태였으나 조선은 이를 정확한 대비로 연결하지 못했다.
‘징비록’에는 당시 중국에 ‘히데요시가 중국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과거 명나라 남동부를 흔든 왜구와 규슈 히라도에서 활동한 중국인 왕직의 사례가 얽힌 왜곡된 정보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규모와 경상도 방면의 주 진격로를 예측하지 못하며 정보 판단의 한계를 노출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후 동아시아 3국 인물들이 한반도에서 직접 대면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정보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전란 중 일본으로 끌려갔던 피로인들의 귀환은 전후 조선의 대일 정책을 재정비하는 자산이 됐다. 그 중심에 있는 강항의 ‘간양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등 중앙 유력자뿐만 아니라, 조선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다테, 사타케, 모가미 등 도호쿠 지방 다이묘(영주)들의 이력까지 상세히 담아 조선 조정의 일본 이해를 도왔다.
강항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체류 중 후일 일본 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법명 순수좌)와 교류하며 조선의 과거 제도와 석전 등을 전수했다. 이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조선의 학문과 기록문화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사례로 꼽힌다.
조선은 전란 이후 정보 체계를 재정비하기 위해 통신사를 부활시키고, 역관을 정사로 하는 문위행을 쓰시마에 파견하는 등 외교 교섭과 정보 수집의 기회를 넓혀 나갔다. 정확한 정보를 모으고 냉철하게 판단해 위기에 대비하는 일 역시 호국의 중요한 조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미래전략실 조인희 연구위원은 “호국보훈의 달에 두 문헌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라며 “전란의 기록은 호국의 근본이 단순한 기억과 추모를 넘어 정확한 정보 수집, 냉철한 정세 판단, 그리고 철저한 대비에 있음을 일깨운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