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작작면. 이름이 참 독특하고 정겹다. ‘비비작작’은 제주방언으로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낙서하듯 글씨를 마구 끄적거리거나 그리는 모양’을 뜻한다. 제주산 메밀국수 위에 올려진 여러 재료를 면과 함께 자유롭게 섞어 먹는다는 의미가 담긴 비비작작면. 그 이름만큼이나 탄생 과정 또한 흥미롭다.
제주도에는 흑돼지, 갈치조림, 고기국수, 고사리 등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향토 음식이 많다. 그러나 제주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뜻밖에도 메밀국수다. 해발 500m 고지에 자리한 서귀포시 안덕면 광평마을,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제주 메밀의 진가를 만난다.
메밀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물 빠짐이 좋은 화산토가 많은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배해 왔다. 현재 제주도는 국내 최대 메밀 주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여 가구가 살아가는 이 작은 마을은 청년층이 도시로 떠나고 노년층의 자연감소로 마을이 존폐위기를 맞는다. 주민들은 고심 끝에 지역 자원을 활용해 마을 재생사업에 나선다. 40~50대를 주축으로 마을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광평마을 주민들이 선택한 해법은 지역의 대표 작물인 메밀이었다. 메밀을 재배했지만 판로가 쉽지 않아 결국 직접 소비에 나선다. 재배에 그치지 않고 외식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메밀의 특성을 살린 메뉴 개발에 집중했고, 그 결과 많은 제주 여행객의 호응을 얻는다. 평일 점심에도 대기 줄이 이어지고 주말이면 일찌감치 오후 3시까지 대기표가 마감되기도 한다.
주민들의 노력 끝에 탄생한 메밀 음식 중 하나인 비비작작면은 메밀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소금빵을 길게 늘여놓은 듯 둥글게 감아 올린 메밀면 위에 제철 나물과 들깨, 김, 쇠고기 고명이 정갈하게 놓인다. 넓은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젓가락을 들고도 차마 비비기가 아까워 잠시 눈으로 먼저 음미한다.
맛은 담백하면서도 깊다. 고소한 들기름과 간장으로 만든 특제 소스가 메밀면과 어우러지고 통들깨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고소한 풍미를 더한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은은한 감칠맛이 오래 남는다. 메밀 본연의 맛을 충실하게 살린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100% 제주도산 순 메밀로 만든 음식이 성공하면서 이 마을뿐 아니라 지역 농가에도 안정적인 판로를 제공한다.
지금 제주도에는 수국이 한창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메밀밭 또한 볼거리다.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듯 피어난 하얀 꽃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처럼 굳이 흐뭇한 달빛이 내려앉지 않아도 충분히 황홀하다. 많은 여행객이 하얗게 펼쳐진 메밀밭에서 사진을 남기며 특별한 추억을 만든다.
존폐위기의 작은 마을을 살려낸 메밀. 이 사례는 포항을 비롯한 경북 지역 농촌마을이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새로운 활로를 찾는 노력과도 맞닿아 있다.
한 그릇의 음식에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길을 찾아낸 주민들의 노력과 도전, 그리고 제주 자연이 품은 이야기가 함께 담긴다. 한라산 자락에서 만나는 메밀 한 그릇. 제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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