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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음의 도’를 지키다···옥천 조덕린의 삶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10-20 17:31 게재일 2025-10-2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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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 300주년 학술대회 
1725년 영조에 전달했다 유배·귀양 고초 겪어
후손들의 신원으로 262년 만인 1899년에 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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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사간소(을사십조소의 초안), 한양조씨 옥천종택 기탁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조선 후기 남인의 대표 학자이자 지조와 절의의 상징인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隣·1658~1737)의 삶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영양군이 주최하고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주관하는 ‘옥천 조덕린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가 21일 오후 2시 한국국학진흥원 대강당에서 개최된다.

조덕린은 하회의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고, 갈암 이현일의 학문을 계승한 영남 남인의 거목이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에 제수됐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1725년 영조에게 올린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에서 당쟁 폐해 극복, 인재 등용, 민생 구제를 촉구했으며, 군신 간 도리 회복과 도덕·예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68세의 나이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이후 두 차례의 귀양과 재유배를 겪었으나 학자적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 1736년 서원 난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돼 제주 유배 길에 강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일생은 진리와 공공 책임을 추구한 조선 지식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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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조덕린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 포스터. 

조덕린 사후에도 가족들은 그의 뜻을 이어갔다. 아들 조희당은 초당을 세워 학문을 계승했고, 손자 조진도와 형제들은 조부의 신원(伸冤)에 평생을 바쳤다. 남인 학통을 이은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과 교유하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262년 만인 1899년 복관이 이뤄졌다. 영양 주실에 터를 잡은 한양조씨 옥천문중은 조덕린의 지조와 학문을 가문의 근본으로 삼아 ‘곧음’의 도를 지켜왔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우인수 경북대 명예교수(옥천 문중의 신원 노력과 가학 전통), 윤재환 단국대 교수(조덕린의 삶과 시세계), 이근호 충남대 교수(현실인식과 ‘을사십조소’의 경세론), 송혁기 고려대 교수(사직 상소문의 입의와 수사), 서근식 성균관대 초빙교수(‘역경의의’ 연구) 등이 발표자로 나서 다각도로 조덕린을 분석한다.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연구소장이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한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조덕린 선생은 진리와 정의를 추구한 학자의 본분을 지킨 인물”이라며 “학술대회를 통해 그의 사상을 성찰하고, 개인의 양심과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인문정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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