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銀魚)’라... 세상이 붙인 이름에서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른다. 은처럼 빛나는 물고기란 뜻인가, 그게 아니면 은처럼 값져서 귀한 사람의 밥상에 오르는 생선이란 의미인가?
식자(識者)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시대불문 출간되는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어간 한국문학 애호가들에게 ‘은어’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두 명 있다.
울진 왕피천·영덕 오십천 물 맑고 깨끗
‘청류귀공자’ 별칭 지닌 은어 살기 적합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 등장
높은 품계의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
입맛 까다롭던 연산군 은어구이 즐겨
1990년대 중반. 당시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이름을 높여가던 윤대녕이 ‘은어낚시통신’이란 제목의 단편집을 출간한다. 그 책의 표제작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독자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아껴가며 읽은 20세기 막바지 빼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나를 보태자면, 서울의 유명한 대형서점 가운데 한 곳에선 책의 제목만 보고 ‘은어낚시통신’을 소설 판매대가 아닌 ‘취미 서적’으로 분류해 진열했었다고. 오래전 일이니 지금 와서 그게 사실인지 풍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편견 없이 한국 소설을 읽고 거침없이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한다’는 거장 문학평론가 김윤식(2018년 별세)이 ‘은어’와 ‘윤대녕’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앞서 언급된 작품을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문장”이라 상찬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김윤식은 죽었고, 윤대녕도 갑년을 훌쩍 넘긴 문단 중견이 됐다.
책이 나왔을 때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던 기자는 뜬금없게도 소설에 담긴 은유와 함의가 아닌 ‘은어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까진 은어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경상북도 울진 왕피천과 영덕의 오십천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청류 귀공자’란 별칭을 지닌 은어가 살기에 딱 좋은 환경.
20세기 낚시꾼들은 은어가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계절이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은어잡이에 나섰다. 낚은 은어는 자신도 먹고, 이웃에게도 나눴다고. 은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때로는 조림도 해먹는다.
지난 7월. 울진으로 취재여행을 갔다. 동해선 울진역에서 왕피천으로 가는 길.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요즘도 왕피천에서 은어가 잡히나요?”
그에게서 건조하고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 비하면 거의 안 잡힌다고 봐야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사는 프로 수준의 은어낚시 솜씨를 가진 죽마고우가 있고, 그 덕분에 몇 해 전까진 은어회를 먹었다고 했다.
기자가 은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건 7년 전 경북 봉화군의 한 식당에서다. 구이와 조림이 상에 차려졌는데, 잔가시가 너무 많아 발라내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책에서 읽기엔 ‘은어의 살에선 싱싱한 수박향이 난다’고 했는데, 글쎄…. 비릿한 풀향을 느낀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 입엔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자연산이 아닌 양식이라서 그랬나?
‘조선왕조실록’엔 은어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400~500년 전엔 수조와 냉장 시설이 장착된 트럭이 없었으니, 살아있는 상태론 왕에게 은어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어를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를 나라에서 가려 뽑았고 그의 품계가 꽤 높았다는 기록, 성격만이 아니라 입맛까지 까다롭던 연산군이 은어구이를 좋아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전한다.
먹는 ‘은어’가 아닌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 얽힌 후일담도 있다.
소설가 윤대녕은 기자 초년병이던 2004년 제주도에서 만나 새벽까지 통음한 적이 있다. 소설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전지현에 관해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보다 3년 전인 2001년 9월엔 평론가 김윤식의 퇴임 강연을 취재하러 서울대에 갔었다. 당시 연합뉴스 문학담당 기자였던 이성섭과 동행했는데, 교수 한 명의 퇴임 강연에 그토록 많은 기자가 몰린 것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지 못했다. “과연 김윤식”이란 말이 나올 법했다.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존재의 시원’을 말했던 김윤식. 시원이 있다면 종국(終局) 또한 있을 텐데, “존재의 종국은 뭘까요?” 묻고 싶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쓰고 나니 아주 조금 서글퍼지는 감정을 감추기 어렵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