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직접 ‘짧은 시’ 61편 엄선 짧지만 긴 여운 남기는 시편들 삶이 시가 되는 여정 고스란히
“고통이 바뀌면/축복이 된다기에/그 축복 받으려고/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외면할 수 없는 삶/그게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천양희 ‘축복’ 중에서
한국 시단의 거목 천양희(85) 시인이 시력 60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시선집 ‘너에게 쓴다’(창비)를 출간했다. 1965년 등단한 시인은 존재의 본질과 고독을 찬란한 슬픔의 언어로 노래하며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담아낸 시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원로다.
이번 시선집은 방대한 시인의 저작 중 공초문학상 수상작 ‘너무 많은 입’, 만해문학상 수상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청마문학상 수상작 ‘새벽에 생각하다’ 등 여덟 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접 ‘짧은 시’ 61편을 엄선했다. 일부 작품은 시구를 간결하게 다듬고 의미를 더욱 함축해 2025년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도록 새롭게 퇴고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편들의 행간과 여백을 음미하면, 삶이 시가 되는 고단한 길을 걸어온 시인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망과 고독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시들은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에 스며들고, 삶에 대한 통찰과 예지가 담긴 아포리즘은 눈부시게 반짝인다. 천양희 시세계의 요체를 제련하고 연마한 이 선집은 ‘말하지 않은 말, 침묵의 말’ 속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를 읽으며, 짧은 시가 어떻게 큰 시가 되는지 체험하게 한다.(김기택, 발문)”
‘짧은 시’의 정수를 담은 이 시선집은 절망의 바닥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고독한 영혼의 비망록이자, 눈물 머금은 침묵의 언어로 써 내려간 독백의 자서전이다. 시인의 삶의 궤적과 시적 고뇌가 “짧은 시의 침묵과 여백” 속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는 구절에서 시력 60년의 세월을 오직 시로 살아낸 시인의 결의를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눈길은 늘 ‘뒤편’을 향한다. “성당의 종소리” 뒤편에 박힌 “무수한 기도문”, “마네킹 앞모습” 뒤편에 꽂힌 “무수한 시침”(‘뒤편’)을 꿰뚫어 본다. 겉모습 너머를 응시하며 존재의 내력과 삶의 진실을 탐구한다. 나아가 “바람 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고/어둠 속을 더 잘 보려고 눈을 감는다”(‘눈’)라며, 오히려 눈을 감아 본질을 감각하려 한다.
불화와 갈등의 절망 앞에서 시인은 “궁지에 몰린 마음”(‘밥’)을 다독이며, “우울을 우물처럼 마시고 불안을 벗 삼아” 살아온 인생의 황혼녘에 이른다.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완창’)는 깨달음은 눈물겨운 통찰이다. “외면할 수 없는 삶/그게 바로 축복”(‘축복’)이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레 숙연한 마음이 깃든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 시 쓰기로 완성된 내밀한 고백록인 이 시선집은 “어둠으로 빚은 빛”(발문)으로 가득하다.
표제작 ‘너에게 쓴다’는 1998년 출간된 절판 시집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에 수록된 작품으로, 2020년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광화문글판에 일부가 게시되며 재조명받았다. 2연 10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너’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천양희 시인은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이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하며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했다. 탁월한 시로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