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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그림의 대가’ 화가 최용대씨

박선유 시민기자
등록일 2023-08-01 16:09 게재일 2023-08-0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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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향한 관심이 분청사기 시리즈로다양한 재료로 도전하는 실험정신 눈길 
장독대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최용대씨.
장독대 그림의 대가, 경주를 대표하는 작가. 경주미술사 연구회 수석 연구원.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많다. 그는 오늘도 새로운 작업을 위해 실험 중이다. 옹기가 그렇듯 늘 온화해 보이는 그의 겉모습과 달리 내면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청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의 1세대 사진작가 최원호씨. 아버지는 그가 화가가 되는 걸 반대하셨다. 어린 시절 마냥 그림이 좋았지만 어려운 아버지의 뜻을 반대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창시절 교사들이 미술부를 권유했지만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 시절 계림숲은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아버지 몰래 계림숲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한겨울 찬바람을 피해 둑방을 의지해 그림을 그렸다. 바람은 피했으나 얼음의 물통이 얼어붙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를 부르셨다.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는 질문에 미대 진학의 소망을 비쳤다. 그렇게 한 차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당시 경주엔 마땅한 입시학원도 없었고 짧은 서울 생활로는 입시의 벽이 높았다. 그렇게 기회가 사라지고 사진관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그림이 손에서 놓아질리 없었다. 그때 조희수 선생을 만나게 된다. 선생은 서울에서 지내다 가끔 경주에서 지내며 사생을 했는데 주로 계림, 향교를 자주 찾았다. 사진관 일을 하며 몰래 그림을 그리던 때라 그림 재료는 향교에다 숨겨두고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미대 진학이 어려워진 걸 알고 공모전을 추천했다. 목우회, 국전 모두 합격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다. 사진관 일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라는 단서와 함께.


그 사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하루는 중앙파출소에서 신원조회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1970년 중반. 당시 신원조회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 무렵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가난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모 부처에 불려가 고생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림에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초가집을 그린 게 문제일까. 며칠을 맘고생으로 보낸 뒤 돌아온 답은 허무했다. 국전 시상식에 전 박대통령이 참석하기로 되었고 그로 인해 참석 가능자들 모두 신원조회에 들어간 것이었다.


지금은 장독대와 최용대가 떠오를 정도지만 처음부터 그의 작품에 장독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초기 작품엔 풍경 속 일부분이었다. 그러다 오묘한 빛 반사와 옹기의 디테일에 매료되었고 그렇게 작품 전면에 옹기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그의 작품에 큰 변화가 생겼다. 기존 작품에서는 서정적 이야기들이 담겼다면 새로운 분청사기 시리즈에선 이야기 대신 대상인 사물에 기운을 집중해서 그리고 있다. 평소 고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작가는 분청사기에 집중하게 된다. 다양한 표현기법과 자유롭고 활달한 표현,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분청사기의 귀얄, 인화, 조화, 박지, 덤벙의 기법을 회화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말했다. 작품의 본질에 집중해야 울림이 있다. 작품은 관객에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방문 당일도 작업실은 실험을 하기 위한 재료들과 그의 열정을 담아낼 캔버스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담금질을 통해서 단단한 강철이 만들어지듯 최용대 작가의 작품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담금질 해 온 이유일 것이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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