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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예술학교, 잊혀진 6년의 기록

박선유 시민기자
등록일 2023-04-09 19:55 게재일 2023-04-1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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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주도로 건립돼 큰 의의<br/>1회 졸업 조희수 선생 경주 거주 <br/>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 조희수 선생. /경주미술사연구소 제공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70년의 시간이 흘렀다. 불완전한 정치의 시대는 그들에게 그 시간을 말하지 못하게 했고 의도적 무관심은 그곳을 향한 걸음조차 잊게 만들었다.

과거 경주예술학교가 자리하던 자리엔 (구)서라벌문화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앞을 지나며 과거의 영광을 가늠할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관련 대규모 세미나와 전시회가 개최 되었지만 경주예술학교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2014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영남의 구상미술’과 2015년 경주솔거미술관 개관전인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경주예술학교.


이후 한국미술협회경주지부 부설 경주미술사 연구소에서 자료 발굴 및 보존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듯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앙(서울)로 몰리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재능과 열정을 가진 예술계 인재들이 70년 전 경주를 향했다.


도화서 이후 고등 예술 교육기관이 없던 일제강점기엔 일본이나 타국에서 유학 외에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유학을 마친 이들은 보통 본인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 서울로 향했는데 그들은 방향을 달리했다. 경북 내 서양미술이 경주에서 가장 먼저 정착된 이유이기도 하다.


경주예술학교는 1946년 5월 5일 개교해 1952년 6월 이후 폐교한 남한 최초의 예술전문학교다. 1946년 3월 18일 음악과와 미술과를 둔 2년제 예술학원으로 승인받았고, 1948년 6월 음악과를 폐쇄한 후, 1949년 4월 26일부로 회화, 조각, 공예 3개과를 둔 3년제 미술전문 예술학교로 승격되었다.


초기 교수진으로 근현대 거장들인 미술과 손일봉, 김만술, 김준식, 김봉도, 주경, 윤경렬 그리고 음악과는 이의성, 한중길, 천시권, 이호성, 한순각, 권태호, 고태국, 박정양, 한중길, 유장령이 참여했다. 정부 혹은 사학 재단이 아닌 민간 주도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또 한 가지 큰 의의를 갖는다.


1회 졸업생으로 김인수, 박기태, 박재호, 박해룡, 배원복, 사공침, 이경희, 이수창, 조남표, 조희수, 최동수가 있고, 2회 졸업생은 이출이, 오영재, 배봉화, 최준식이 있다. 이외에 1회 졸업생과 같이 입학하였으나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수원, 폐교 이후 홍익대 미술과로 편입한 김종휘, 그리고 홍익대로 새로 입학한 이희돌이 있다.


졸업생들은 각 지역에서 각각 교수, 교사, 작가로 활발히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들 중 경북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근대미술가 조희수 선생은 현재 경주에 거주 중이다.


2016년에 열린 솔거미술관 기획전 지역원로작가 초대전은 근대 미술의 산증인인 조희수 선생의 작품(27점)으로 시작되었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1924년생인 선생은 현재 필담으로만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연로하신 상태다. 당시 서류등록 상태를 생각한다면 실제 나이는 100세를 넘을 수도 있다는 측근의 이야기다. 작품 및 자료 보존에 촌각을 다툴 때다.


선생이 작품에 대한 기증 의사를 밝힌 후 경주에서도 작품 보존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행정 절차 문제로 현재까지 미온적인 상태다. 시기가 늦어져 홍수로 떠나보낸 고청 선생의 많은 유산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포항미술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선생의 작품은 포항시립미술관 설립 당시 작품 한 점 매입되어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역사의 가치와 금전의 가치.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무게 재기를 하느라 하루하루 소중한 역사를 잃어가고 있다. 더 늦기 전 문화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되돌아 볼 때다.


/박선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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