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은행나무잎들이 황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은행잎들은 노랗게 변신할 것이다. 샛노란 얼굴로, 새봄처럼 가을을 밝힐 은행잎….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은행나무낙엽이 노랑나비 되어 팔랑팔랑 추는 군무를 바라보는 가슴은 기쁨이자 슬픔이며, 멀고도 가까운 저 너머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자, 기대이기도 하다.
은행 종자 떨어진 가을 보도(步道)엔 아슬아슬 인생길 곡예가 공연된다. 떨어진 은행을 요리조리 피하며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공연이다. 실수로 은행을 밟으면, 신발 밑창에 그 외종피의 고약한 냄새가 착 달라붙는다. 한 번 뭍은 냄새는 그냥 두면 오래 가 사람 기분을 언짢게 한다. 악취를 없애려면, 신발 바닥을 꼼꼼히 씻어내야 하는 고역을 치러내야만 한다.
수년 전 한 가을날, 아내가 비닐봉지에 껍질을 까지 않은 은행 두어 줌을 담아왔다. ‘가로수 은행은 중금속 오염으로 먹으면 안 될 거’라는 말에, 시골에 사는 이로부터 은행을 얻은 친구가 그 일부를 나눠준 것이란다. ‘냄새나서 어쩌려고’ 하는 내 걱정에, 다음 날 남편 출근 뒤 혼자 펜치로 작업하였단다.
며칠 후, 펜치를 쓰려고 봉지에서 꺼내는데, 은행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다. 펜치의 손잡이 수지(樹脂) 부분에 은행 냄새가 밴 것이다. 아내가 은행 외종피를 벗긴 고무장갑을 끼고 펜치로 중종피를 제거했나 보다. 펜치와 함께 들어있던 공구들의 손잡이에도 냄새가 났다. 퐁퐁 탄 물로 공구들을 꼼꼼히 씻었다. 냄새가 조금 줄었을 뿐, 없어지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펜치 손잡이는 은행 냄새가 제법 난다.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 한단다. 신생대에 번성했는데, 고생대인 2억 7천만 년 전 화석도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긴 세월, 많은 기후환경의 변화에도 살아남은 은행나무의 비결은 무엇일까. 연구자가 아니기에 과학적 추론은 어렵지만,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리라. 외종피의 악취나, 몸체에 다른 나무들보다 해충이 없는 점 등을 보면 은행나무는 자기 보호력 강화 쪽으로 진화한 지혜로운 나무다.
인간이 개체로는 약하지만, 공동체가 되면 지구의 어떤 생물 종보다 강한 것은 은행나무를 닮아서가 아닐까. 천부적 지능으로 도구 만들고, 집 지으며, 옷 짓고, 문화와 과학기술문명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지능을 다른 생명이 본다면 은행의 외종피 같지 않을까.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 문명’이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맘대로 온갖 생명을 주무르고 재미로 죽이기도 하니까.
사람은 떨어진 은행을 피할 수 있고, 줍거나 따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생명은 인간을 그리할 수가 없다. 이성(理性)보다 지능을 앞세워 물질문명에 치중한 인간의 생활 행태는, 기후변화를 불러와 지구촌 뭇 생명이 생존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은행나무는 생존에 필요한 진화만 한다. 반면 인간은, 생존을 넘어 욕망만 채우려 자연의 하소연을 외면해왔다. 이는, 인간이 지구촌을 공멸의 길로 떠밀고 있음이다.
인간이 은행나무의 지혜라도 좀 닮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