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오지 산골에 1907년 세원진 척곡교회다. 민족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군자금 전달 통로였던 교회다. 봉화 척곡교회는 독립을 위해 앞장서고 명동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에 앞장선 역사의 현장이다.
명동서숙은 북간도의 명동학교와 같은 이름으로 초기 한국 교회가 애국계몽과 선교의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척곡교회와 명동서숙 학교를 세운 김종숙 목사는 대한제국 탁지부(재무 총괄 관청) 관리였으나, 을사늑약 이후 퇴직하고 처가의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을 세웠다. 명동서숙 학교를 먼저 열었고 이후 척곡교회를 건립했다.
척곡교회 예배당은 한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ㅁ자 기와집이다.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솟을대문형 출입문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를 구분했기 때문. 왼쪽문은 독립운동가들이 피신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됐다. 복원된 담장의 구멍은 일본 헌병과 순사를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만주 용정, 서간도, 북간도 시베리아를 경유해 독립자금이 전달되기도 했다. 또한 봉화 의병장과 독립투사들이 비밀 회합을 가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교회 부지 안에 명동서숙을 지어 독립운동가 자녀와 지역주민 자녀의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교회와 학교를 설립한 김종숙은 토지를 팔아 군자금과 독립지원금을 마련했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이 때문에 김종숙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고, 김종숙의 처남인 봉화의병장 석태산이 소백산에서 잡혀 처형되는 시련도 있었다.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은 오지 산골에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오다 2006년에야 등록문화재가 됐다. 척곡교회에 보관된 기록 5점은 201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0호로 지정됐다. 1907년부터 1955년까지의 세례명부, 1926년부터 사용된 봉화 척곡면려회 출석부 등이다.
독립투사가 활동했고, 독립 군자금의 전달 통로였던 역사적인 장소지만 왠지 소외된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민족의 독립과 후세 교육에 앞장섰던 역사의 현장인 척곡교회에 대한 재조명과 교육장으로의 활용이 절실해 보였다. /류중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