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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서 퇴계 이황의 뿌리를 만나다

박월수 시민기자
등록일 2022-04-26 19:37 게재일 2022-04-2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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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곡재사 전경. 오른쪽으로 보이는 뒷산이 진성이씨 시조묘역이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동방의 주자’라 일컫는 퇴계 이황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곳이 있다. 아귀다툼과 같은 권력쟁탈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유교적 이상향을 실현할 실험무대로 퇴계는 청송을 택했다. 학문을 닦고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면 청송만 한 곳이 없었다. 또한 청송은 퇴계의 입향조가 가문을 시작한 곳으로 진보(진성)이씨의 본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십 년 동안 아픈 몸으로 일없이 국록만 받아 부끄러운데 / 도리어 넓은 은혜 입어 고을 원이 되게 하시네 / 청송 백학과는 비록 연분이 없어 가지 못해도 / 푸른 물 붉은 산과는 인연이 있었나 보구나 / 이제 궁궐에서 촛불 나누어주던 밤이 그리울 테고 / 독서당을 떠나려니 매화 감상하던 날들 잊을 수 없다네 /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 돌보는 일에 심신이 지칠 때는 / 동헌에서 문득 그대들의 옛정이 생각날 것일세”-‘청송 백학’ 전문


‘청송 백학’은 병약해진 마흔여덟의 퇴계가 청송으로 오고 싶어 자청했으나 단양 부사로 발령 나면서 그 아쉬움을 읊은 시다. 임금은 청송 부사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불허했다. 자신의 뿌리가 있고 백학이 어우러진 신선세계라 일컫는 청송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그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송 안덕에 그를 배향하는 송학 서원이 세워져 있다.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가람실에는 퇴계 이황의 시조 묘가 있다. 시조 묘 아래에는 진성이씨 시조인 이석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재를 지내기 위한 기곡 재사가 우뚝하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 자형 구조로 세워진 기곡 재사는 전면 아래층은 출입구를 두고 위층은 비가 올 때 제사 지내는 곳으로 활용했다. 오른편 건물은 노년층이 사용하는 상방을 두고 왼편은 장년층이 사용하는 중방을 두어 공간을 기능에 따라 적절히 배치했다. 조선 후기 경상북도 북부지방 재사 유형을 연구하는 자료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5호다.


진성이씨 시조 묘가 이곳에 세워지게 된 데에는 유명한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 이석의 장남 이자수가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을 때였다. 풍수에 밝은 현감이 아전을 대동하고 고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감람골의 지세를 눈여겨보고 아전에게 일렀다. “달걀을 감람골 봉우리에 묻고 자시가 되기를 기다려 닭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너라.” 현감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역시나 닭이 울어서 아전은 그곳이 명당임을 직감하고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훗날 아전은 부친상을 당해 그곳에 장사 지내는데 관을 묻고 돌아서면 관이 땅 위로 솟아오르기를 반복하였다. 그제야 아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한양의 옛 현감을 찾아가 사실대로 고하니 “그곳은 큰 벼슬을 한 이가 묻힐 자리라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묻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하며 자신이 입던 헌 관복을 내어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5대 만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퇴계의 뿌리가 있는 곳, 더 가까이 독립운동가 이육사를 배출한 진성이씨 본향이 궁금하다면 청송으로 발걸음 하시길 권한다.


/박월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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