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왔다 돌아갔으나, 1598년 정유재란으로 다시 봉화 감동골로 피난을 왔다. 류성룡 선생이 영의정에서 파직되고 형 운룡과 감동골에서 반 년을 기거하며 ‘징비록’(국보132호) 집필을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다.
봉화군 춘양면 도심1리 감동골에는 겸암 류운룡 선생이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기도단이 사과밭 가운데 430년 동안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돌을 모아 약간의 높이로 기단을 쌓고 크지 않은 돌을 세웠다. 너무나 볼품없는 기도단이다.
비만 많이 와도 금방 흔적이 사라질 것 같은 단이 400년이 넘도록 보존이 된 것은 밭주인과 감동골의 주민들이 노력을 한 결과다. 류운룡 선생은 이곳에서 왜적의 침입으로 어려운 나라을 위해 기도를 하고 학문을 익혔다. 비가 오지 않아 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하늘이 감동해 비가 내렸다고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감동골 이라고 부른다.
류운룡 선생이 심은 감나무와 식수로 사용했던 샘터가 남아 있고 후손들이 감동골 입구 도로변에 겸암 류운룡 유적비(文敬公謙菴柳先生道心村遺蹟碑)를 세워 역사를 알리고 있다.
춘양은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류운룡 선생이 난을 피해 왔던 곳이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지가 있던 곳이다.
춘양은 태백산, 옥석산, 문수산등 1천m 이상의 높은 산들에 쌓인 평지가 있고 운곡천이 흘러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다. 가상의 무릉도원으로 가는 관문인 석문동(石門洞天)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류운룡 선생은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신 분으로 주역과 풍수지리학에 정통해 뛰어난 통찰력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다가 인품과 학문이 빼어나 의금부도사, 한성판관, 안동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류성룡이 선조에게 형 류운룡을 해직시켜 노모를 모시도록 건의하고 이 청이 받아들여져 가솔들을 무사하게 춘양 감동골로 피난시킬 수 있었다.
400년이 넘도록 겸암 선생의 기도단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단이 위치한 사과밭 관리를 위해서는 방제차도 다녀야 하고, 예초관리기도 다녀야 하는데 불편함을을 감수하고 지켜준 밭주인이 고마울 따름이다.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가는 도로변에 겸암 유적비가 있고, 구국일념으로 치성을 드렸던 기도단은 유적비에서 감동골로 300m 정도 들어가 사과밭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춘양 십승지의 이정표 같은 기도단을 지자체가 정비해 문화유산으로 관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430년 동안 불편을 참고 지켜온 소중한 역사자료이고, 또 조선의 유토피아 춘양 십승지의 표상 같은 곳이기에.
봉화 춘양 십승지를 찾는 기행자들은 꼭 이곳을 들렸다 간다. 태백산 사고지와 함께 지역 역사 콘텐츠 활용과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통한 살기 좋은 봉화 홍보에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류중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