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1984년 어린이날 MBC동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노을’이다. 아이들이나 부르던 동요가 전국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도록 유행한 것은 이 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다. 노을 하면 바로 노랫말이 저절로 입안에 맴돈다.
내가 사는 포항은 일출로 유명하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첫해를 보겠다고 호미곶 근처에 방을 잡고 새벽잠을 포기하며 마중을 한다. 그 틈에 한 번도 낀 적이 없는 이유는 일출보다는 저녁밥 짓는 연기 낮게 깔릴 때 서쪽 하늘 보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서나 노을을 볼 수 있는 서해까지 낙조를 보러 가는 일은 먼 거리라 큰맘을 먹어야 가능하다. 그보다는 우리 동네 노을을 찾아보기로 했다. 도시 숲에서 석양은 좁고 길게 보인다. 고층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또 우리 집 뒷베란다 창살 사이로 가끔 핑크빛 노을이 걸린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보려고 하면 그새 어둠이 깔리고 만다. 순식간에 건물 사이로 사라지는 빛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간차 공격이다.
일몰 담당인 서해는 어디로나 해가 떨어지지만 동해는 일출 담당이라 노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쪽으로 해가 지는 곳이 어디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미곶이 떠올랐다. 삐죽이 튀어나온 곶 끄트머리에서 움푹 들어간 영일만 안쪽을 바라보면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거라 짐작했다.
일몰 시간을 알아보니 5시 9분이다. 여름보다 두 시간 이상 짧아졌으니 4시에 집을 나섰다. 호미곶 중에 둘레길을 걸으며 노을을 보기 좋은 동네로 향했다. 도구에서부터 바다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 달리다 보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나온다. 공원 일월대에 올라 옆으로 비껴보는 낙조도 볼만하다. 정면이 아니라 난간에 서서 시내를 향해 몸을 돌리면 구름에 반사된 노을을 날이 좋은 날에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차를 더 달려 대동배 2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웠다.
해파랑길 15코스 중에 이 동네가 노을 맛집이다. 구룡포 쪽으로 둘레길 따라 걷다 보면 저 데크 끝에 큰 바위가 우뚝 섰다. 멀리서 보니 사람의 옆 모습을 닮았다.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에 굳게 다문 입, 눈썹 자리 즈음에 작은 소나무가 자란 것이 모아이 상이라 입간판에 이름 붙여질 만한 바위다. 가까이 가니 모아이 상은 사라지고 그냥 절벽이다. 다시 뒷걸음치며 보니 얼굴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건너편으로 해가 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우리도 여기서 노을을 보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기울이니 파도 소리에 맞춰 하늘도 점점 붉게 물드는 소리가 들렸다. 일렁이는 바다에 바위섬 몇 개, 그 뒤로 먼 산이 지평선을 낮게 오르내리며 그려놓았다. 그 위에 동그란 해가 막 내려앉으려 주춤주춤거렸다. 마지막 남은 해의 힘이 어찌나 센지 빠알간 색이 파도 위에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그 사이로 갈매기가 한 줄 시를 쓰며 가른다.
노을은 바라보기에 좋은 그림이다. 시간이 자연에 걸어놓은 걸작이다. 하지만 노을도 바라보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전시회를 찾지 않아 놓친 거나 매한가지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 저렇게 붉은 노을도 언제나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다. 비슷한 시간에 며칠을 찾아갔어도 그 시각에 구름이 덮여 파도 위 해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첫날만치 감동적이지 않았다. 조금씩 흐리고 조금씩 덜 붉었다.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해가 산 너머로 꼴깍 넘어 가버렸다. 노을이 가장 좋은 시간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사위가 어슴푸레해지며 하늘과 바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 붉은 부스러기들이 하늘과 바다에 가득 흩뿌려져 세상이 오로지 붉은색 하나였다. 바라보던 친구들 얼굴도 수줍게 붉어졌다. 친구들 눈 속에 명화가 내걸렸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