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지휘한 류성룡이 남긴 회고록… 전쟁사 낱낱이 기록 <br/>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 등재 위한 학술대회 등 본격적 활동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일본·명이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이었다.
조선에서는 1차 전쟁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며 2차 전쟁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전쟁초기 일본은 총 26만6천700명을 편성해 조선을 공격했으며, 조선군은 개전초기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했다.
일본군은 전국시대 지속적인 전투로 단련된 강병이었으며, 그에 반해 조선은 비록 전쟁의 기미를 알고 1년 전부터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국방력이 전체적으로 쇠퇴해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초기 관군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각 지방에서 의병이 등장해 일본군을 공격하고, 명군이 1592년 7월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국면은 전환되고, 조일 양국 간의 전쟁은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초기부터 종전까지 지휘하였던 류성룡이 남긴 회고록이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좌의정으로 재직하면서 전쟁이 격화되자,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전국을 지휘했다. 전쟁 직전,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전쟁에 대비했으며, 전쟁 중 군량의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속오군제도를 창설했다.
전쟁이 끝난 뒤 류성룡은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전쟁의 원인과 과오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지난 날의 잘못을 경계하며, 뒤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는 의미의 ‘시경’구절을 따서 이름 붙인 것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연구의 1차 사료로 당시 정치, 제도, 외교 등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다.
‘징비록’은 16권 본 이외 이본(異本)으로 한 종류가 있다. ‘근포집(芹曝集)’, ‘군문등록(軍門謄錄)’을 제외한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錄後雜記)’로 된 2권 본(二卷本)이 있는데, 간행 연대의 선후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류성룡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다. 이에 따라 장계(狀啓: 관찰사나 왕의 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소차(疏箚: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차자)·문이(文移: 상급 관청과 하급 관서 사이에 오가는 공문)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했다. 책의 구성은 ‘징비록’ 2권, ‘근포집’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 2권 및 ‘녹후잡기’로 돼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징비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학술대회에서 이욱 교수(순천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어떤 관점에서 부각하여야 할지,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진정성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에 대해 설명했다.
정해은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는 자료적 가치를 탐색하고, 후대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 주목했다.
우인수 교수(경북대)는 국정운영 책임자로서의 모습에 주목해 ‘징비록’이 국정운영을 책임진 사람의 ‘전쟁보고서이자 경륜에 기초한 경계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김영찬 박사는 일본에서의 ‘징비록’ 간행에 주목해, 1678년부터 일본에서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95년 일본에서 최초로 간행됐다고 밝혔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