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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정수’ 세계가 주목한 조선

피현진 기자
등록일 2021-08-24 19:38 게재일 2021-08-2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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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교 책판’ <br/>국학진흥원 2002년부터 수집<br/>2009년 학술적 가치 규명 시작<br/>305개 문중 6만4천226장 신청<br/>2015년 세계유산 등재 최종 결정
장판각 내부모습.

[안동] 2015년 10월 4일부터 아랍 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개최된 제12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IAC)’에서 한국국학진흥원이 신청한 ‘유교책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유교책판을 수집하기 전까지, 유교책판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의 여타 세계기록유산이 원래부터 국·내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던 것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이라면, ‘유교책판’은 각 문중과 서원 등 흩어져 있던 것을 조사·수집하는 작업부터 그 가치 규명과 홍보 등의 노력을 통해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이르게 됐다.

특히 출처와 시대가 다른 기록물을 한곳에 모아 신청한 것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사례이다. 이는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컬렉션’을 중시하는 현재의 시책에도 부합된다는 점도 등재의 큰 요인이 됐다.

영가지-안동권씨 복야공파 길송문중.
영가지-안동권씨 복야공파 길송문중.

‘유교책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인쇄·발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주로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에서 보관해 왔으나,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농촌사회의 해체로 ‘유교책판’은 보관상의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에 한국국학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02년부터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진행해 ‘유교책판’을 관리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2005년 이를 보존·관리할 장판각을 지어 기탁된 목판을 보관해 왔다.

이후 한국국학진흥원은 ‘유교책판’이 가진 학술적 가치에 주목하고 2009년부터 목판연구소를 설립해 그 가치를 규명, 305개 문중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718종 6만4천226장의 유교책판을 2013년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해 국내 후보로 선정됐고, 최종적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은 1460년 청도의 선암서원에서 판각된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으로부터 1955년에 제작된 책판까지, 시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종류의 책판들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퇴계선생문집’ 책판과 같은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책판으로부터 근대 출판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판각한 책판도 있다.

퇴계선생문집(경자본).
퇴계선생문집(경자본).

IAC에서는 ‘유교책판’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공론(公論)’을 통해 그 제작의 당위가 결정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출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완성된 책판은 개인이나 문중의 소유가 아니라, 지역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동 소유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고, 보존·관리에도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용의 진정성이다. 718종에 이르는 유교책판은 그 질과 양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수록된 내용은 유학적 이념에 따라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궁구했던 선현들의 기록이다.

유교책판은 평생을 통해 그러한 삶을 추구했던 선현들을 현창하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출간함으로써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인간상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선후기가 세계에서 유교적 이념이 가장 깊이 있게 적용되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교책판이다. 이 때문에 유교책판은 물질문화재이면서도 이념을 통해 한 사회가 동일한 인간상을 꿈꾸게 했던 정신적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 유교책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유지했던 조선을 세계가 새롭게 주목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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