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헤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 대해
이카루스의 추락을 그린 그림들, 만추올리, 사라체니, 샤갈. 특히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카루스의 추락에 화답이라도 하듯 두 손을 치켜들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라는 사람이기보다는 환호하는 사람의 몸짓에 가깝다. 만추올리와 사라체니의 그림에도 무슨 불구경하듯 이카루스의 추락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브뤼헤의 그림에는 이러한 구경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아랑곳없이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왜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카루스의 추락에 무관심한 것일까?
이에 대한 기존의 평자들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이 그림이 이카루스의 오만과 경솔함에 대한 풍자로 보는 견해다. 이카루스는 아버지인 다이달로스의 말을 거역하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는 절제할 줄 몰랐다. 난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어했고, 자신이 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꾼도 목동도 낚시꾼도 이 사태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카루스의 추락은 오만과 경솔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다. 그 당연한 일에 놀라워할 까닭은 없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죽었다고 쟁기질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속담과 관련되어 있다. 이카루스의 죽음은 세상을 중단시킬 만큼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죽음일 뿐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이 속담과 관련지어 그림을 보면 다시 두 개의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이카루스가 추락를 했든지 어쨌든지 세계는 여전히 저토록 아름답다는 것, 그러니 너의 좌절을 확대하지 말 것, 너의 좌절을 확대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여전히 아름다운 세계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해석은 타인의 불행에 관계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기적 모습에 대한 풍자라는 것이다. 이 그림 속의 농부, 양치기, 낚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가 죽건 말건 신경쓸 여력도 없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풍자로도 읽을 수 있다.
△구경의 속성, 사건의 속성
이러한 해석의 공통점은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이 이카루스의 죽음을 의식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이카루스가 죽기도 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샤갈, 맞추올리, 사라체니와 같은 화가들은 이카루스를 다룬 그림에서 구경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림 속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카루스의 추락을 모두 동시에 쳐다보며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놀람이나 경악이 아닌, “우와, 저렇게 떨어지는구나!”고 말하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구경이란 어디까지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건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인식된다. 왜냐하면 사건이란 순식간에 휙하고 일어나는 어떤 것,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났는지를 알게 될 때는 이미 사건이 모두 정리되고 난 이후다. 아마 이카루스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의 떨어지는 속도와도 맞물려 정말 휙하고 지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하다면 어디에 구경꾼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샤갈을 위시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경꾼이며, 이카루스가 추락하기를 고대하고 기다려온 사람들이다. 이카루스가 떨어지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이와 달리 브뤼헤는 이카루스가 떨어지는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목동, 농부, 낚시꾼들은 이카루스의 죽음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죽음에 무지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러하다면 이 그림은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유일한 추락 혹은 추락의 유일성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왜 브뤼헤의 그림에는 이런 구경꾼들이 없는 것일까. (반복하자면) 왜 브뤼헤의 그림의 등장인물들은 이카루스의 죽음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저들은 `구경꾼`이 아니다. 저들은 이카루스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브뤼헤가 그리고자 한 것은 풍자나 교훈이 아닌 “현재적 사건”이었다. 이 글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떻게 끝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더 좁게는 우리 자신의 끝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카루스 역시 자신의 끝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추락은, 그의 죽음은 예고되지 않은 돌연한 죽음이었다. 이 돌연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지나가길 바라는 오나라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이카루스의 죽음은 현재적인 것이었다. 현재적인 것은 늘 그러하듯 그것을 인식할 틈을 주지 않는다. 현재적인 사건은 인식의 구멍, 혹은 인식의 공백이다. 이 텅빈 곳 어디에도 구경꾼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카루스가 죽기 전에 사람들은 이카루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비행을 한다는 것도, 그리하여 태양 가까이로 올라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추락하리라는 것을 다이달로스는 물론 이카루스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이카루스의 죽음은 예견된 바 없는 유일무이한 현재적 죽음이었다. 그러니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이 그의 죽음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낚시꾼이 하늘을 볼 이유는 없다. 그는 찌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저 한가로운 목동은 우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이카루스가 떨어지는 쪽이 아니라 그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카루스는 우연으로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그렇게 추락하고 있다.
“도둑같이 오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이야말로 사건의 현재적 속성을 가장 잘 함축하는 말일 것이다. 사건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때, 아무도 모르게 `도둑`처럼 다가온다. 브뤼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미 정해진 질서 혹은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신화적 세계에서 벗어나, 그 방향도 시작도 끝도 없는 그런 현재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리라. 이미 알고 있는 사건,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을 브루겔이 그렸다는 것. 이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브뤼헤가 그린 것은 이카루스의 추락, 더 정확히는 이카루스의 최초이자 최후의 추락, 유일한 이카루스의 추락을 그렸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사건의 현재적 속성을 보여주고자 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브뤼헤는 가장 선구적인 모더니스트이며, 리얼리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