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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는 어쩌다 청록파가 되었나

등록일 2017-09-15 20:45 게재일 2017-09-1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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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에 대해 ⑴
▲ 불국사 옆에는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에도 가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
▲ 불국사 옆에는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에도 가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다.

경주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시인 박목월이 있다. 그리고 박목월은 청록파로 잘 알려져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박목월에 대해서도 하겠지만 오늘은 박목월보다는 청록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청록파`가 아니라 `청록집`에 관해 말해왔다. 사람들은 청록파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청록파`가 어쩌다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고? 문학사에서 엇비슷한 경향을 띠는 사람들을 `~파`라고 부른다. 김소월과 같은 시인은 `민요시파`고 정지용과 같은 시인은 `시문학파` 또는 `순수파`라고 불리며, 서정주는 `생명파`로 분류된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자신들을 스스로 그렇게 부를 때도 있지만 대개 사후적으로 규정되며 문학 연구자들이 그 이름을 명명한다.

다시 말해 유파의 이름은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지어지며, 유파의 이름이 곧 그 유파의 성격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청록파`의 유파적 성격은 무엇인가? `청록(靑鹿)`은 `청록집`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 `청록`은 다시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청록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박목월이다. 이에 대해 그는 “푸른 사슴이라는 것이 보다 참신하고 날렵하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청노루`라는 생소한 이름 앞에서 “청(靑)은 현(玄)과 흑(黑)에 통하는 것으로 그것은 거무스름한 노루나 사슴”이라고 나름대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록`은 박목월이 직접 해명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동물로서 서정화시킨” 개인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청록파`의 `청록`을 통해 유파의 특징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박목월의 설명은 `청록집`의 이름을 붙인 이유에 관한 것이지 `청록파`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쩌다 `청록파`가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는가?

▲ 청록집 초판 표지. /동리목월문학관 제공
▲ 청록집 초판 표지. /동리목월문학관 제공

△`삼가시인` 혹은 자연파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은 1946년 6월 을유문화사에서 공동 사화집 `청록집`을 상재하였다. 이들이 비록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정식 시인이었지만, 이 시집이 나오기 전까지 이들은 한낱 무명시인에 지나지 않았다. 박목월은 이 시집 발간에서부터 장정까지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판 일백 페이지, 초판 3천 부, 가격은 25원이었다. 표지에는 푸른 사슴, 속표지에는 촛불을 밝혀 들고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아트지에 2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자 파트에는 초상화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으며 자필로 사인한 것이 인쇄되어 있었다.

자필 서명의 글씨체가 조지훈은 단아하고 박두진은 달필이면서 날카롭고 나 자신의 글씨는 소박한 대로 야무지지 못하였다. 그것이 각자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초상화는 김의환 화백이 아협 편집실에서 우리들을 모델로 직접 그려 주었다.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준 사람은 김용환 화백의 계씨로 `주간 소학생`의 삽화를 맡고 있었던 김의환 화백이었다. 당시 을유문화사의 주간을 맡고 있었던 조풍연은 “순수시를 지향하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3인 시집”이라는 광고 문구를 붙였다.

그러면 누가 이 시집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들을 어떻게 불렀을까? 김동리는 오장환, 서정주, 유치환을 잇는 젊은 시인으로 이들을 추켜세우긴 했지만 이 시인들을 `삼가시인(三家詩人)`이라고 불렀을 뿐 `청록파`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 시집이 나오고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김춘수는 “`청록파`라는 한 에꼴로 묶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김춘수만이 아니라 당대에 기라성 같은 시인인 서정주도 그런 김춘수의 의견에 동의하여 `자연파` 정도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청록파`는 어쩌다 `청록파`가 되었는가? 그 실마리가 되는 단서를 정한모로부터 찾을 수 있다. 1968년 조지훈의 돌연한 죽음과 함께 `청록파`는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된다. 이때 박두진과 박목월은 발 빠르게 `청록집 이후`와 `청록집 기타`라는 시집 두 권을 펴냈고, 여기에 정한모가 `청록파의 시사적 의의`를 실으면서 그는 `청록집`이 “간행됨을 계기로 `청록파`라는 명칭은 정립되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시단이나 학계의 누구도 `청록파`라고 부른 적이 없는데 `청록집`간행과 함께 `청록파`는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 세칭 `청록파`

`청록집`이 나오고 3년이 지나 박화목이란 시인은 한 신문에다가 세 시인을 싸잡아 평가절하는 글을 썼다(`청록파의 미래`, 경향신문, 1949.9.28).

그는 현실도피적이고, 박목월 시는 소아적이고 조지훈 시는 허무주의적이라며 이들을 맹비난했다. 그런데 박화목은 “필자는 세칭 청록파라 하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삼가시인의 시작 행동을 열성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며 어두를 떼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칭`이라는 단어다. 이것은 한낱 수사(修辭)에 지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간행됨을 계기로 `청록파`라는 명칭은 정립되었다”라고 한 정한모의 언급과 통하는 점이 있다. 즉 `청록파`는 특정한 누군가가 칭한 이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즉 불특정 다수가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청록파가 `세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박두진, 박목월 역시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1963년 박두진은 `나의 시작 노트`에 “1946년엔가 낸 것이 `청록집`. 그래서 얻은 이름이 달갑지도 섭섭지도 않은 청록파라는 별칭”이라고 했다. `청록집 기타`의 `서문`에서 박목월은 “흔히 우리들을 청록파라 부른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세칭`을 풀어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문적이지도 않은 독자대중이 부르기 편한 대로 부른 이 이름이 어쩌다가 공식적인 유파의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박목월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집은 처음부터 초판으로 3천부를 찍었고, 이후 3판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이 시집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가 문단이나 학계를 압도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자리 잡았다고 조심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해보자면, `청록집`이 나올 당시 문단이나 학계에서 이 시집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시집을 눈 밝은 대중이 알아보았고 이들에게 `청록파`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던 것이다. 해방이후 모든 사안들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중립적이고 무관심한 `자연`이라는 소재는 이데올로기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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