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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알면서 패배하기-`페스트`를 읽고

등록일 2017-08-18 21:28 게재일 2017-08-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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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트`는 소설의 무대가 되는 오랑이 얼마나 평범한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작가는 오랑이 평범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를 통해 까뮈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의 무차별성과 무작위성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 `페스트`는 소설의 무대가 되는 오랑이 얼마나 평범한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작가는 오랑이 평범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를 통해 까뮈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의 무차별성과 무작위성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를 울린 책과 영혼을 울린 책

나를 울렸던 최초의 책은 `플란다스의 개`였다. 책을 덮고 두꺼운 솜이불 속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넬로를 죽인 작가를 원망했다, 아니 저주했다. 나는 그런 슬픔을 몰랐으며, 그런 가혹한 슬픔이 삶의 실체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슬픔, 어떤 연민도 없이 잔혹한 것이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눈물로써 그런 슬픔을 거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때 느꼈던 슬픔의 감각이 최후의 감각이길 간절히 바라고 살았다. 하지만 슬픔에 최후란 없으며, 슬픔은 적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슬픔 앞에서 깨닫게 된다. `페스트`를 읽으며 나는 `플란다스의 개`를 읽었을 때처럼 울었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작가를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 슬픔보다 타루가 보여준 고귀한 행동 앞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는 것.

며칠 전 만난 분이 자신의 인생의 책을 말해준 일이 있다. 그 분은 그 책의 가치에 대해 확고하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였는데, 그 분의 말을 들으며 나에게 인생의 책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돌아왔을 때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책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제 `페스트`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리외와 그의 친구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평범한 도시 오랑이 갑작스런 페스트로 인해 봉쇄된다. 이 소설은 도시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이 집중하고 있는 인물은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의사 리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며, 그를 도와주는 타루와 그랑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을 통해 작가는 페스트 앞에서 최선을 다해 맞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페스트에 맞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적극적 허무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페스트는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찾아올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기에 결국 맞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맞섬은 허무하게 패배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적극적 허무다.

페스트로 인한 죽음이 일상화 되어버리는 이 도시에 리외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어떻게든 달아나고 싶은 사람,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탈출하고 싶은 랑베르 같은 사람도 있다. 랑베르 입장에서 보자면 여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기자인 랑베르는 오랑 사람도 아니고 취재차 이곳에 잠깐 들렀을 뿐인데, 하필이면 재수 없게 페스트에 발이 묶인다. 파리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도 말이다. 랑베르는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탈출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페스트라는 병에서 달아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죽음으로부터는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 역시 리외와 함께 죽음의 공동체에 합류하게 된다.

△코타르와 파눌루

이와는 달리 페스트를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파눌루 신부며, 다른 한 명이 코타르다. 코타르는 정말 재밌는 인물이다. 그는 다른 도시에서 사람을 죽이고 오랑으로 숨어들어와 한 동안은 잘 살았으나 형사들이 기어이 그의 목전까지 추격해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로 도시가 봉쇄되자 코타르는 기뻐한다. 도시의 행정이 마비되자 경찰들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을 잠시 멈추었기 때문이다.

코타르는 이러한 페스트가 계속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페스트와 함께 세상이 모두 망해버리길 바라고 있다. 나도 코타르처럼 생각한 적이 있다. 군대에 졸병 생활을 할 때 내무반 생활이 힘들어 늘 얼차려를 받았다. 얼차려를 피하고 싶어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던 적이 있다. 페스트의 상황에서 코타르와 같은 사람을 발견해내는 까뮈의 능력은 정말 놀랍다.

파눌루 신부는 코타르와는 조금은 다르다. 파눌루 신부는 페스트를 꼭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고 한다. 페스트는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죄 짓지 않은 자는 이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더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파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통 씨 아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후에도 파눌루 신부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오히려 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한다. 그러다 파눌루는 페스트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감기 같은 것에 걸린다. 파눌루는 이것을 페스트로 오인한다. 그의 오인은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강력하여 페스트가 아님에도 페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죽고 만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죽음의 공동체

악은 상상하기 쉽다. 행해지는 것은 더 쉽다. 건물을 짓는 것보다 부수는 것은 쉽다. 파괴는 쉽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것이, 도덕과 윤리를 세우고 지키는 것보다 그런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훨씬 쉽다. 파괴는 형태를 변형시키는 일이다.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은 쉽다. 만들어진 형태를 일그러뜨리기는 쉽다. 하지만 형태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까뮈의 소설 쓰기는 건물을 짓는 일이며,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며, 도덕과 윤리를 세우는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과 같다.

페스트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붕괴되는 현장에서 목을 길게 드리우고 죽음을 기다릴 수 있고,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쉽다. 살아내는 것보다 죽는 것이 쉽다. 그런데도 그 거대한 재앙,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수습되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속에서, 끝없는 실패 속에서 왜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가? 왜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병든 사람을 돌보고, 그런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더라도 왜 다시 노력해야 하는가. 왜 매일 매일 실패하는데, 그 끝없는 실패 앞에서도 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연대하여야 하는가, 아니 우리의 연대는 가능하긴 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우리는 연대할 수 있는가. 까뮈는 이런 거대한 물음에 답하고 있다.

까뮈는 페스트와 같은 무자비한 죽음 앞에서 연대를 통해 맞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까뮈가 말하는 연대의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보인다. 그랑과 리외, 타루와 리외, 타루와 코타르, 랑베르와 리외의 우정은 사소한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대화는 핑퐁게임처럼 주고 받게 된다.

위대한 사상이나 사유는 거창하지 않고 단순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이 곧 연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예수는 그 실천의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까뮈는 그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일방적인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대화, 오직 대화! 그것만이 길이라고,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 우리의 추상성은 구체성으로 우리의 피상적 태도는 실천적 태도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저마다 이런 페스트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거나 사랑하다 죽는 일이다. 실패의 정면에서 장렬히 실패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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