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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으로 산다는 것

등록일 2017-08-11 20:46 게재일 2017-08-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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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암반덕은 해발 1천100m가 넘는다. 이 고원은 밭들로 가득하고 그 밭엔 영락없이 배추가 심겨 있다. 먼 산엔 아직 운해가 다 가시지도 않아 나비가 날아오더라도 바다인 줄 알고 여기에는 내려앉지 않을 것 같다. `19세`의 주인공 정수는 이런 밭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곳은 이제 감자꽃이 한창이었다. 그 흰 꽃의 무리가 마치 잘 가꾸어 놓은 화원 같고 바다 같았다. 거기에다 여름에 심은 고랭지의 무밭과 배추밭도 바다처럼 끝없이 푸르렀다” <br /><br />/사진출처: 출사코리아<br /><br />
▲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암반덕은 해발 1천100m가 넘는다. 이 고원은 밭들로 가득하고 그 밭엔 영락없이 배추가 심겨 있다. 먼 산엔 아직 운해가 다 가시지도 않아 나비가 날아오더라도 바다인 줄 알고 여기에는 내려앉지 않을 것 같다. `19세`의 주인공 정수는 이런 밭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곳은 이제 감자꽃이 한창이었다. 그 흰 꽃의 무리가 마치 잘 가꾸어 놓은 화원 같고 바다 같았다. 거기에다 여름에 심은 고랭지의 무밭과 배추밭도 바다처럼 끝없이 푸르렀다” /사진출처: 출사코리아

△ `기술이 아재`

중학교 때 나이 많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기술을 가르쳤다. 그 분은 우리처럼 고제면에서 태어나 선생님이 되었다.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이곳으로 돌아와 기술을 가르쳤고, 짬을 내어 사과농사를 지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라고 했지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5년도 더 뒤에 정년퇴임을 하셨다. 선생님은 오래도록 늙은 채로 더 늙진 않았다.

기술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세련된 옷을 입지도 않았고, 승용차를 몰지도 않았다.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코란도를 몰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선생님이 출근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다 알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88고속도로에, 선생님이 그 차를 몰고 대구라도 갈라치면 교통체증이 일어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때만 해도 남학생은 기술을 듣고, 여학생은 가정을 들었다. 여학생들은 그래도 실습을 할 수 있는 가정실이 있어 거기로 가고 나면 교실은 반이 비어버렸다. 선생님은 우리를 앞쪽으로 불러 모아 놓고 손주에게 옛날이야기 하듯 수업을 하셨다. 기술이라는 게 실습을 해야지 책으로 배울 거라곤 거의 없어서 선생님은 젊었을 때 일본에 가서 본 신문물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것이 당시 얼마나 놀라운 기술이었는지에 대해 말하셨다. 아니 사실은 놀람 그 자체에 더 집중하곤 하셨다.

선생님은 버릇처럼 “내가 아마 경상도에서는 냉장고를 제일 처음 샀을거야”라고 서두를 때었다. 그런 에피소드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이었지만, 이제 어떤 이야기가 나올 차례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선생님을 무시했고, 우리끼리 `기술이 아재`라고 불렀다.

선생님이 가르쳤던 기술발전의 역사, 플라스틱의 종류, 컴퓨터의 역사, 뭐 이런 것들 따위는 다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사춘기를 갓 지나 이제 머리가 굵어져 반항적인 행동을 하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일갈했다. “거기 멋있는 줄 알고 그카나?” 사실 그랬다. 그런 게 멋인 줄 알았다. 두발 제한이 있었지만 몰래 머리를 기르고, 무스를 발라 머리를 넘기고, 교복 바지 대신 껄렁한 기지바지를 입고, 모여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그런 식으로 어른 흉내를 내며, 우리는 스스로를 멋있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잘 나가`는 줄 알았다.

그 분은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우리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술이 아재`는 `거기 멋있는 줄 알고 그카나?`라는 말을 통해 어떤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생각,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인식, 그 자체를 문제 삼았다. 멋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어리며, 그 수준은 얼마나 낮은지를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가 아마 경상도에서는 제일 처음 오토바이를 샀을거야`와 같은, 당신이 생각하는 자랑, 그 자랑의 수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 `어른놀이`

`19세`(이순원).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성장담에 대한 것이다.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어떤 소설이 청소년을 위한다거나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 것이다. 또한 예상독자가 청소년이라고 해서 그 소설을 얕잡아 보는 것 역시 오만이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의 강원도를 배경으로 주인공 정수를 등장시키고 있다. 갓 중학교에 들어간 정수는 문교부장관이 누구냐는 국어 선생님의 질문에 `검정필`이라고 말했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한다. 교과서마다 `문교부장관 검정필`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검정필`이라 불리게 된 주인공은, 두 살이나 많지만 같은 반인 박승태와 친해진다. 정수는 승태에게 성교육을 배우고, 승태는 정수에게 학교 공부를 배우면서 둘은 친해진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서울대에 들어간 형 정석처럼 공부로 성공하긴 글렀다고 느낀 정수는 상고를 지망한다. 상고를 졸업해서 은행에 들어가 남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고 싶어했다. 돈을 빨리 번다는 것, 이것을 정수는 어른의 징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수는 주판에는 젬병이어서 자신의 생각처럼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수는 꿈을 농사꾼으로 바꾼다. 대관령에 해도지(賭地) 땅을 얻어 고랭지 채소를 심어 큰돈을 벌겠다는 속셈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기어이 학교를 그만둔 정수는 배추 농사짓기에 돌입한다. 그해 정수는 일꾼을 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보다 배추를 늦게 옮기게 되는데,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정수의 배추밭은 풍년이 든다. 소원대로 큰돈을 만지게 된 정수는 그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고 승태와 술을 마시고 매춘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수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왠지 그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른 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가슴을 무겁게 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213면)

△ 어른은 어려워

정수가 자신이 보인 일련의 행동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거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한탕을 노리고 도박이나 투기에 뛰어들고 싶을 때라든가,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라든가, 그런 순간에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운 경우는, 오히려 확고한 생각이나 신념에 갇혀 있을 때다. 이것을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불러도 좋겠다. 내 조카는 너무 어려서 “너 잘못했지! 빨리 사과해”라고 말해도, 심지어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피아제는 이런 유아기의 심리상태를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했지만, 이런 성향이 꼭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몰인정하게 행동하는 구두쇠이야기가 동양과 서양에서 발견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서양의 스크루지는 꿈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고 난 뒤에야, 우리나라의 옹고집은 도승의 도술로 갖은 고생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잘못된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예측하고, 자신을 돌이켜 행동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어쩌면 진짜 어른은 내 행동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게 만드는 나의 생각이나 신념을 포함하여 나의 관념과 사유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언제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을 어른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고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우며, 우리는 늘 어른과 아이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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