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전남 곡성 출신의 3선 이정현(전남 순천) 의원이 한국 정치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이변을 연출했다. 영남권을 지지기반으로 한 한국 보수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호남 출신 당 대표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전대 선거운동 기간동안 “바다가 갈라지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지지를 호소했던 이 의원이 몸소 `기적`을 일궈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이 의원은 지역적으로는 영남, 계층적으로는 사회 엘리트층이 포진한 현 새누리당 주류와는 체질적으로 상반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이 의원은 전당대회에 당 대표로 출마한 당권주자 중 유일한 호남출신일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 지역구 의원 112명 가운데 호남을 지역구로 둔 2명의 의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다른 한명은 농림부장관을 지낸 정운천(전북 전주을) 의원이다.
여기에 정치권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커왔다고 할 수 있는 당 사무처 당직자 출신이다. 스스로를 “집권 여당의 대표머슴 후보”라고 표현한 이 의원은 전당대회 당일 연설에서도 “말단 사무처 당직자 시절부터 시작해 이날 이때까지 16계단을 밟아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른바 `흙수저` 당대표다.
이런 이색경력을 가진 당 대표이다 보니 취임 직후부터 당 운영방식부터 많은 변화를 가져와 `이정현 효과`란 신조어까지 회자되고 있다.
우선 이 대표의 등장으로 정치권은 명실상부한 `호남전성시대`가 됐다. 이에 따라 지역주의와 세대간 장벽은 상당히 낮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전남 곡성출신의 이 대표가 새누리당 대표로 등극한 만큼 호남출신인 정세균 국회의장과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그리고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까지 여야 3당 대표와 국회의장단이 모두 `범호남 출신`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이는 헌정 사상 처음이다.
이정현 효과가 가장 눈에 띄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곳은 바로 당 운영방식에서부터다.
새누리당의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이정현 신임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의 공개 모두발언이 모두 생략됐다. 이전에는 매주 월·목요일 개최되는 정례 최고위원회의는 당 대표와 원내대표에 이어 최고위원단과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등이 언론을 통해 국정 현안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내놓은 뒤 비공개로 진행되는 방식이었으나 이같은 오랜 관례를 깨버렸다. 집단지도체제에서는 최고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하도록 돼 있어 당 대표와 최고위원간 의견이 엇갈릴 경우 `봉숭아학당` 모양새가 돼 왔던 것을 지양하자는 취지란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서 최고위원들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 대표는 오히려 “회의다운 회의를 위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 이날 최고위원회의에는 최근 정치권 현안으로 떠오른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 실무 관계자가 현안보고를 위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과거 국정 현안이 있을 때 관련 부처의 장·차관급이 주로 참석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형식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쪽으로의 변화란 긍정적 평가가 당 안팎에서 나왔다.
뭐니뭐니해도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이 대표의 등장은 경색된 여야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추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불러왔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이 대표와의 상견례에서 “여당 대표로서 역량을 기대한다”고 덕담을 건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반면 이정현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 대표가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만큼 수평적 당청관계 회복에는 상당히 더딘 행보가 될 것이란 전망이 대표적이다. 또 이 대표가 호남의 대표성을 띠고 있지 않은 데다, 오히려 이 대표가 친박(친박근혜)계 중심의 당 운영으로 계파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는 걱정도 없지 않다.
아무쪼록 이변이라 할 만한 보수정당의 호남대표 선출을 계기로 이 나라 정치권에 새로운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흘러넘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