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을씨년스럽던 겨울이 포근하고 따뜻해진다. 마음이 설렌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가에서 눈을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부랴부랴 김천에 사는 친구를 떠올리고 열차표를 예매했다.
우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소녀처럼 깡충거릴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며 조금은 엄숙해질 것이고 흰 산은 법당을 들어서는 우리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것이다. 절을 하거나 스님과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밖에서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리라. 눈부신 산사의 고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운이 좋다면 겨울 별들과 달빛이 적막한 산사 마당에 몰려와 저녁 예불 드리는 정취도 맛볼 수 있으리.
내가 그린 산사 여행은 완벽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설경으로 뒤덮인 들과 산, 나목을 어루만지며 무궁화호 열차는 느리게느리게 달린다. 차창 밖으로는 처마가 낮은 집들이 흰 눈을 덮어쓴 채 옹기종기 고개를 맞대고 정답다. 직지사는 유명세와 달리 조용하다. 신라 눌지왕 때 불법을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과 고려 초 능여화상이 절을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절터를 측량해서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한 때는 정실만 352칸에 달하고 부속 암자가 26개나 있었을 정도로 동국 제일의 가람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사세가 기울어 퇴락하는 것을 대대적인 중건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웅전 법당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섰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 뒤에는 아주 큰 삼존불탱화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하나하나 정성으로 칠해졌을 단청과 용 모양의 기둥, 연꽃 모양의 나무 조각들로 법당 안은 화려하다. 색이 바래고 먼지에 덮여 그 옛날의 고색창연함은 없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가슴을 서늘케 한다. 누군가의 불심과 예술혼으로 빚어진 법당에서 친구와 나는 108배를 시작했다.
난방이 되지 않아 법당은 한기가 느껴진다. 낡고 오래된 마룻바닥은 움직일 때마다 삐걱댄다. 1600년의 역사를 견뎌온 소리일까? 절을 하는 동안 마음은 온통 시린 발과 마룻바닥이 토해내는 신음소리로 모아진다. 자기의식을 완전히 소멸시킬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붓다는 말했다.
비로전은 맞배지붕으로 푸른 대숲을 지고 단아하면서도 고고하다. 본래 혼돈이었던 비로자나불은 자신의 존재감에 허무함을 느껴 스스로 어둠 깊숙이 들어가 오랜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빛이 되었다고 한다. 빛과 지혜로 두루 세상을 비추는 존재로서 하느님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인간과 우주만물, 게다가 모든 부처를 창조한 본초불이며 창조신이다.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노사나불도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그 뒤로 현세의 고통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는 천 개의 부처님도 모셔져 천불전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약사여래불의 왼손에 약병이나 약함이 없고 수인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다. 불자인 친구는 별로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몸을 녹이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추위에 떠는 나를 걱정한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때마침 명부전에서 쉬고 계신 젊은 스님을 만났다. 친히 비로전까지 따라 나와 궁금증을 들어주었으나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시원한 답을 들을 수가 없다. 나의 어쭙잖은 지식은 긍금증과 답답함을 더욱 증폭시킨다. 승복을 입은 스님이 불교기초가 이래서야 되겠냐며 농을 던지자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초보승이라며 미안해했다.
무심코 돌아서는 내게 스님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아 합장한다. 나는 스님을 대할 때의 기본 예의를 잊고 말았다. 뒤늦게 한 손에 식어가는 차를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답을 하고 무안함에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귀동냥 눈동냥이긴 하지만 그동안 숙지했다고 믿었던 것은 마음이 아니라 이론에 불과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빚어진 실수였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핑계다.
그도 나도 둘 다 초보인 셈이다.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밀던 그의 출가 날이 하얀 눈 위로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무언가에 회의를 느껴 절로 들어왔을 그와 짧은 지식으로 사찰 읽는 재미에 빠진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른 초보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직지라는 이름이 죽비가 되어 나를 때린다. 붓다의 고행은 왜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설법은 무엇을 위한 가르침이던가?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쳐다본 나의 아둔함이 드러났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란한 지식이나 부, 명예가 아니다. 자기와 이웃, 세계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겨울 환상에 끌려 여기까지 왔듯 가시적인 것들에 탐닉하며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본다. 나를 설레게 했던 눈은 진흙이 되어 발밑에서 질척거린다. 대빗자루 자국이 선명하던 어느 가을날의 직지사 마당은 얼마나 고결해 보였던가. 변한 것은 없다. 직지사 초보 스님이 내게 준 소중한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