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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동무생각` 작곡배경 대구 청라언덕 짝사랑했던 `백합같은 내동무`는 어디 갔나

이종기 시민기자
등록일 2014-11-20 02:01 게재일 2014-11-2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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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고 재학시절 오가며<bR>어느 여학생 좋아하게 돼<bR>`백합은 휜 피부` 해석도<br>언덕 한쪽 노래비 세워져
▲ `대구 근대화 거리` 청라언덕길에 세워진 작곡가 박태준 선생의 동무생각 노래비.

`대구 근대화 거리`가 우리나라 우수관광 명소인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관광 철을 맞아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그 중 계산성당, 제일교회, 선교박물관, 그리고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대구의 몽마르트 언덕으로 불리며 황금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00년대 미국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매입해 교회나 병원, 신학교를 지어 영남의 선교활동기지로 삼음으로써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시초로 남게 됐다.

지금도 잘 보존돼 마치 서양거리에 온 듯, 이국적 풍경에 많은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3·1만세 운동 길이었던 90계단 언덕이 `청라언덕`이다. 한쪽에 청라언덕내역과 동무생각노래비가 돌에 새겨져 있고, 건너편에 작곡가 박태준 선생(1901-1986)의 연보가 사진과 함께 설치돼 있다.

`청라(靑蘿)언덕`은 푸른 담쟁이가 덮인 언덕으로 박태준 선생이 대구 학창시절에 다니던 곳이다. 그가 만든 노래 `동무생각`의 탄생지이며, 그 음악인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이 아래 동네에서 태어나, 계성학교를 다니며 이 언덕길을 오르내렸고, 어릴 때부터 음악 재능이 뛰어나 제일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전공해, 근대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며 오빠생각, 기러기 등 주옥같은 많은 가곡을 남겼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계성학교를 다닐 때, 그 근처 신명학교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을 좋아하게 됐다. 아침마다 청라언덕을 오르며 아름다운 그 여학생을 훔쳐보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여학생은 예쁘기도 했지만 피부가 백합처럼 희어, 노래가사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그녀를 두고 읊은 것이라고 한다. 차츰 짝사랑의 도는 더해갔지만, 내성적인 성격에 고백은 못하고, 가슴으로 안은 채 시간만 흘렀고, 결국 그녀는 졸업을 하고 일본유학길을 떠나버렸다.

박태준 선생이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이다. 노산 이은상과 이 학교에서 만나 서로 친해졌다. 노산이 이런 사연을 듣고, `그 소녀와 청라언덕을 노래로 만들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면 어떻겠느냐?`고 하며, 그가 가사를 써주면서 곡을 쓰라고 했다.

1922년에 탄생된 동무생각은 모두 4절로 돼 있다. 이 가곡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하며, 항상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당시 시대배경이 일제 강점기 때인 만큼, 노래전편의 속내에는 `조국의 해방`이란 봄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백합 같은 내 동무`인 그녀에 대한 그리움 속에 묻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때 그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진 지식인이요, 예술인임으로 누구보다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며, 또 그 의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심어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 노래를 들으면, 어린 시절 중학교 여선생님이 생각난다. 당신은 부임해 처음 이 노래를 가르쳐줬고, 섬 학교의 유일한 여선생으로 우리들 가슴에 사랑의 싹을 심어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인지, 내겐 이 곡이 1절만이라도 멋있게, 그리고 온전히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곡으로 남아있다.

/이종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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