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시민문화행사의 일환으로 포항연극협회 제2회 마카다(모두 다)연극축전이 지난 10월 25~26일 열렸다. 김삼일 연출로 `출발`이 김삼일자유소극장에서 상연됐다. 윤대성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이 작품은 압축되고 정제된 대사가 단막극 구조와 조응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꿈을 찾아 떠났다가 제 자리로 돌아온 사내`와 `꿈도 꾸지 못하고 현실에서만 맴도는 역원(驛員)`의 형상이 동등한 의미의 하중으로 그려진다. 관객들은 사내가 되기도 하고, 역원이 되기도 하면서 `인생의 순환선 어딘가에 서있는 자기 자신`에게 존재론적-인식론적 질문을 던진다.
`적극적 여백의 미학`으로 관객들의 에너지까지 뽑아내 소극장 공간을 숭고미로 채우고 싶은 속내를 드러낸 김 연출가는 공연 후 인터뷰를 요청한 필자에게 대뜸 `포항연극100년사` 자료집 발간 이야길 꺼냈다. 향토사가 박일천 선생이 1967년 집필한 `일월향지`와 동아일보 기사들을 토대로 작업을 해, 지금 마무리 단계라고 했다. 시대별로 특징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1914년에는 동제와 동해 별신굿 공연, 1920년대에는 청년회 중심의 계몽연극, 1930년대에는 재생(再生) 이명석 선생 중심의 순회공연과 신풍운동, 1946년에는 아동극, 1950년대에는 학생극이 융성했다고 했다. 특히 학생극을 이끈 수산고등학교의 권영호는 나중에 화가로 대성했다. 포항시립미술관에서 `푸른 회유(回遊), 권영호` 유작전이 열리기도 했다. 김 연출가는 “포항연극100년사는 이명석 선생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을 되뇌고 되뇌었다.
이명석 선생은 `상록수 정신`으로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한편으로, 그들을 조직해 악단과 극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다니며 신풍운동을 주도했다. 1965년 포항문화원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던 김 연출가는 당시 문화원장이던 이명석 선생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고 신상률, 손춘익, 박이득과 함께 포항문예부흥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했다.
1964년에 은하극단이 창단됐지만 연습실이 없어 포항문화원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드디어 1965년 7월 애린 공민학교 강당에서 시극 `비와 대화`(최동규 작, 백야 연출)를 올렸다. 그런데 배우는 7명이었는데 관객은 고작 4명이었다. 이명석 선생은 배우들을 다독이며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말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배우들에게는 이 말이 `포항문예부흥운동`을 위한 밀알이 되자는 다짐으로 들려서 모두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은하극단이 창단된 지 17년이 흐른 81년, 서울신문 문화면에 `문화 불모지에 꽃피운 연극예술 17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83년에는 `전국최초의 시립극단-포항시립극단`이 창단됐다. 그 후 제1회, 제3회, 제7회 전국연극제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 제3회 때는 차범석 작 `대지의 딸`을 김삼일이 연출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이휘향이 여자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명석 선생은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6·25 전쟁으로 교육기회를 놓친 이들을 위해 애린 공민학교를 운영하는 한편으로, 흥해 한센인촌-애도원을 설립해 한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인간 상록수상`을 받았다. 선친의 정신을 이어받아 애린복지재단을 설립한 이대공 이사장은 사회복지, 장학, 학술, 문화예술 분야에 매년 2억여원을 지원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고, 지역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이들을 위해 애린문화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포항연극100년사에는 `포항문예부흥운동의 씨를 뿌린 선구자-재생 이명석 선생`과 그 제자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출발`하는 포항연극100년사에는 제2의 이명석 선생이 나와서 포항문예부흥운동을 이끌어야만 한다. 또한 포항문화재단을 빨리 설립해 포항문화예술비전을 새롭게 수립하는 한편으로, 이를 토대로 포항문예부흥운동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지원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제2의 한흑구, 제2의 손춘익도 나와야 하고, 미술에서는 제2의 권영호도 나와야 한다. 아울러 포항문예부흥운동에 기여할 인재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포항의 메디치가(家)`도 출현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포항문예부흥운동에 힘을 실어 주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