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발코니에 심어놓은 화초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바쁜 일상 중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시간, 그리고 주말뿐이지만 소파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되고 마침내 발코니로 나가 하나하나 살펴보고 물도 주면서 5분에서 10분씩은 시간을 보낸다.
요즈음 가장 관심을 쏟는 것은 이른 봄 씨앗을 뿌려 이제 15㎝ 키에 널따란 잎사귀를 맺은 몇 그루 겨자씨나무이다. 겨우 싹이 튼 1~2㎜ 정도의 것들도 많이 있는데 서너 개가 먼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관심을 쏟는 것은 올봄 어렵게 구해놓은 유카나무이다. 잘 자랄지 몰랐는데 50㎝ 높이의 줄기 옆으로 두 개의 싹이 돋아나 10cm 이상의 길이로 기다란 잎사귀가 펼쳐지고 있다. 또 다른 화분에는 유카나무 뿌리 한쪽을 15㎝ 정도 잘라 심어 놓았는데 역시 10㎝ 높이로 싹이 돋아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발코니의 화초들이지만 자라나는 모습도 이뤄내는 풍경도 하나의 자연이고 유니버스(Universe)인 것 같다. 물론 필자가 물을 주고 옮겨심기는 하지만 자라나고 꽃을 피우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일이다. 아, 이곳에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면 더욱 자연을 이룰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영화 `아마겟돈`을 방영하고 있다. 1998년 작품으로 꽤 오래된 것이라는데 그 이름이 주는 심각함과 우주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장면 장면이 스펙터클함을 주는지라 꽤 심각하게 열중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우주로 가서 단단한 유성의 표면에 245m나 되는 구멍을 뚫고 핵폭탄을 설치하고 폭파시켜야 하는, 그래야 `핼리혜성(Halley`s Comet)`과 같은 거대한 유성군의 지구충돌을 막을 수 있기에 벌이는 한 무리 굴착기술자들의 스토리였다. 어찌 보면 유치한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우주의 모습과 진한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그러한 영화였다.
저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저 하늘의 거대한 유니버스, 그리고 이 발코니 정원의 작은 화초들의 자라남. 나는 자전거를 타며 이 두 가지 유니버스를 바라보면서 월요일인 내일 있을 강의내용들과 수천㎞ 떨어져 있는 미국에 유학중인 두 아들들을 생각하고 있다.
내 살아가는 이 동네와 그리고 이 세계라는 유니버스. 또한 내 자신 속을 흐르는 수많은 갈래의 생각들. 또 다른 유니버스를 일깨워주는 듯한 저 영화.
필자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도 영화이야기를 해줄 때가 있다. 러시아 혁명 전후의 긴박함, 시베리아의 기나긴 겨울, 그 가운데 젊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닥터 지바고`.
때에 따라서는 전쟁터의 급박함과 고뇌를 담은 `위워 솔저스` 같은 베트남 배경의 전쟁영화를 언급할 때도 있고, 로마제국하의 노예들의 반란을 그린 `스파르타쿠스`, 코사크족의 애환을 그린 `대장 부리바` 등을 이야기를 해줄 때도 있다. 물론 `아마겟돈`도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카테고리로 언급될 것이다.
요즈음 수업시간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주제는 전공분야와 연관된 발코니 정원이며 옥상정원 이야기이다. 생태계라는 것, 지구라는 유니버스의 순환시스템이라는 것, 이 모두가 함께 언급되기 마련이다.
자기 내지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이 모여져 거대한 도시며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각자가 공동의 삶, 공통의 유니버스인 지구생태계를 배려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로서도 이 사소한 발코니정원 이야기를 단순히 화초 가꾸기가 아니라 우리 지구를 생각하고 유니버스를 생각할 그러한 주제로 학생들에게 예를 들 것이다. 일요일날 본`아마겟돈` 같은 영화와 연계해 하나의 생태계며 인생살이를 좀 더 구구 절절히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