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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이야기(1) 도시 미화운동과 샹그릴라

등록일 2014-05-21 02:01 게재일 2014-05-2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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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문 한동대 교수·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요즈음 매주 토요일 아침 30여분을 운전하여 한 이웃 도시를 방문하고 있다. 예전에도 가끔 들러보던 이 도시는 한 도농통합시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는데, 필자에게는 평범한 소도시라는 인상 이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좀 천천히 차를 몰아가며 사방을 보니 이 지방에서 보기 드믄 넓은 들에 산줄기가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지세 좋은 곳으로 보여 졌다. 이날따라 약간의 안개가 끼어 신비해 보이는 이 벌판을 운전해가며 이 소도시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명당`같이 보여지는 이 소도시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은 주변의 광역도시들에 밀려 고속화된 교통로상의 한 작은 마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도심이 작은 구릉이나 녹지대 없이 너무 밋밋한 것, 랜드마크적인 건물이나 구조물의 부재, 토질 탓인지 산에 울창한 산림이 보이지 않는 것 등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Utopia)`이야기를 하려다가 난데없이 한 마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필자가 “삼사십년 중장기발전계획을 잘 수행한다면 이러한 도시들도 유토피아로 변모될 수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당이란 풍수지리에서 아주 좋은 묏자리, 집터 그리고 도읍 터를 이야기 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산세(山勢), 지세(地勢), 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켜 설명하려는 이론이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회문화의 근거이기도 했다.

인구가 밀집하고 첨단의 인프라가 깔린 현대도시에서 풍수지리가 예전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직도 풍수지리에 따라 뫼를 쓰거나 집을 지어 액운을 막고 자손을 잘되게 하려는 심리가 남아 있다고 보나 지금은 오히려 햇빛, 바람, 수자원, 지가상승 등을 염두에 둔 입지결정론의 한 부분으로서 취급된다고 할 수 있고, 개인의 취향 정도로 취급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말하는 명당이란 몫이 좋아 장사가 잘되거나 학군이 좋고 교통이 편리해 집값이 비싼 곳을 일컫게 되었다고 보아진다. 또한 동네가 아름답거나 공원, 쇼핑 등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곳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20세기 초 구미에서는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자는`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이 유행했었다. 거대한 계획, 아름다운 디자인을 통해서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결정론 내지 물리결정론에 기반을 둔 이 운동은 후에 많은 이들의 비평을 받게 되었다. 시민의 행복은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기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사회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요소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우리 인간이 이상(理想)으로 그리는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이상향(理想鄕), 혹은 샹그릴라(Shangri-La) 라는 단어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힐튼은 `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작품에서 가공의 장소인 샹그릴라를 그려내었다. 이는 쿤룬산맥의 서쪽 끝자락의 숨겨진 장소에 존재하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유토피아로 묘사되었다.

이 장소는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天國)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평균적인 수명을 훨씬 뛰어넘어 거의 불사(不死)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샹그릴라는 우리가 꿈꾸는, 이룰 수 없어 더욱 간구하는 유토피아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보아진다. 반면에 풍수지리나 도시미화운동은 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범주 내의 염원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중환의 `택리지`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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