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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부러운 역사적 감정

등록일 2014-02-20 02:01 게재일 2014-02-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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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환 유럽경제문화연구소장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미묘한 감정관계를 얘기할 때 흔히 우리는 일본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나 교과서 왜곡, 독도문제 등 우리나라와의 식민지 역사를 예상외로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유럽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감정에 대해 소개할 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럴 때는 대충 `독일인과 프랑스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감정을 생각하라`고 소개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대화 당사자가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일 경우 단번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의 영토를 번갈아 점령하고 탈환한 그들이다.

스포츠에서 그들의 일상만 봐도 그렇다. 가령 중요한 축구경기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맞붙게 되는 날이면 그날은 바로 양국의 축제일이 된다. 진정한 적수끼리의 만남과 그에 대한 승리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인 모양이다.

국민들의 정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부도 마찬가지다. 독일과 프랑스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유럽을 향해 함께 질주하는 `쌍두마차`로 표현하면 적절한 것 같다. 그러나 유럽내부의 현안에 대해서 단번에 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경우는 드물다. 걸핏하면 두 나라 언론들은 `형제이기는 해도 미묘하고 복잡한 형제`라며 자기들의 입장을 피력하며 조율에 들어간다. 이 같은 티격태격은 그들이 주고받은 역사와도 결코 무관치 않다. 거창한 유럽의 역사를 모두 끄집어내는 것은 시간낭비다. 프랑스 알자스로렌지역의 얘기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을 기억해 보자.

`여느 때와는 달리 차분하고 엄숙한 교실로 소년 프란츠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지각이다. 정장차림의 선생님은 꾸짖기는커녕 자상하게 맞아주었다. 교실 뒤편에는 마을사람들이 암울한 모습으로 수업을 참관하고 있었다. 알자스로렌을 점령한 독일이 프랑스어 수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날이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픔이 가슴에 와 닿는 프란츠는 평소 프랑스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데 대해 후회를 거듭하며 그날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다`

이 단편소설은 우리나라 일제 식민시대의 국어말살 정책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진작 이 소설은 알자스로렌 지역과는 동 떨어진 남프랑스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이다. 사실 알자스 지역민들의 지금 정체성은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아닌 그저 알자스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알자스로렌의 주도(州都) 스트라스부르는 9세기는 신성로마제국, 17세기는 프랑스, 19세기는 독일, 20세기는 프랑스 등 10여 차례 번갈아 가면서 양국이 점령한 국경분쟁지역이다. 알자스인 중에는 일생동안 여러 차례 독일과 프랑스의 국적을 번갈아 바꾼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금 스트라스부르 시내의 식당 간판과 메뉴에는 불어와 함께 독일어가 함께 쓰이고 있다.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이뤄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와 일본과의 역사적 감정도 독일과 프랑스 못지않다.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 피겨경기가 남아있지만 빙상종목 부진 등으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참가중인 대한민국 대표팀이 3회 연속 톱10 진입 실패는 물론 12년 만에 일본에 추월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네티즌들도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본만큼은 반드시 눌러야 한다는 격려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스포츠를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사실 외국에 나가 일본에 의한 우리의 식민역사를 소개해야 할 때는 머뭇거려 진다.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침략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기에 겪어야 했던 역사라고 변명하면서 서둘러 화제를 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진정 평화를 사랑할 자격을 갖추려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 힘이 있었다면 일방적인 식민의 역사가 이 땅에 존재했을까. 그래서 힘의 균형이 팽팽한 독일과 프랑스간의 역사적 감정이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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