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 잠깐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옆 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 보니 다른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 깼을 때 또 다른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기차는 멈춰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가방과 우산을 챙겼다. 기차에서 내리자 겨울밤의 냉기가 밀려왔다. 사람들을 뒤따라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처음 보는 역이었다. 처음 보는 지명이었다.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뒤돌아보니 기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 날 깨워주길 바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왜 가는지 목적과 과정에 대한 설정이 없다. 다만 떠밀려 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없고 대중과 그 대중이 모인 사회와 나라만 있는 것이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는, 우리는 왜? 어디로? 무얼하러? 그리 바쁜 사람들에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일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