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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과 흉노 논쟁

등록일 2013-10-02 02:01 게재일 2013-10-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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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문 한동대 교수

요즈음 많이 듣는 이야기가 우리 민족, 특히 고대 신라인들과 흉노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흉노는 고대 중국의 만리장성 밖에 이합집산하며 살아가던 일부 유목민들을 일컫는다. 필자도 오래전부터 흉노 내지 훈족에 관해 관심이 컸었다. 전공분야와는 아주 미약한 연계가 있을 뿐이지만 필자는 유학시절부터 고대사에 관심이 커서 틈틈이 관련 서적들을 뒤적여 보고 있었다.

원래의 관심은 고대도시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수메르, 그리스로마, 바이킹, 그리고 훈족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훈족의 뿌리가 동북아시아의 흉노이고 우리 한국인들과도 연계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필자의 유학시절에 건축사를 가르치던 한 건장한 미국인 교수가 자기의 조상은 헝가리인이며, 전투를 잘하고 축구도 좋아한다고 자랑했었다. 그리고 미국 중북부의 금발과 옅은 눈동자 속에서 자기는 어두운 머리털과 눈동자를 지녀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며 한국인인 필자를 보고 좀 멋쩍게 웃기도 했었다.

이 훈족은 몽골초원에 유목하며 만리장성 너머로 중국계 제국들을 공격하던 흉노의 일파로 알려졌으며, 강성해진 한나라에 밀려 서천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러시아와 중동초원은 물론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지도자는 `아틸라`로서 5세기 초반부에 걸쳐 유럽의 중기마병단들을 격파시키며 유럽을 큰 두려움에 떨게 했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이 훈족에게 큰 두려움과 함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자존심 높은 유럽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종족들`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떨었었다. `아틸라`가 대제국 수립 후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왕위 다툼 끝에 제국은 해체되고 훈족들은 흑해 북부초원으로 되돌아갔고 일부가 프랑스며 헝가리에 남아 동양적인 모습의 서양인들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유럽을 침공했던 동양계 유목민들이 이들 훈족만이 아니며, 13세기에 몽골족인 징기스칸과 그 자손들이 유라시아에 걸친 더 큰 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유럽 깊숙이 진격하고 정복했던 이들은 훈족이며, 몽골족들은 폴란드에서 공격을 정지했고, 그 후에도 중국 본토 경영에 열중했었다.

현재의 `몽골로이드`라는 인종적 분류는 몽골인, 한국인, 일본인뿐만 아니라 좀 다른 계통인 중국인들을 포함한 폭 넓은 분류이다. 한국인은 `몽골로이드` 범주에 있지만 몽골족도 중국계도 아니다. 흉노족의 일파인 훈족은 현재의 분류로는 `몽골로이드`라고 해야 할지 백인종인 `코카소이드`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독일ZDF방송이 훈족과 한국의 고대국가인 신라 및 가야를 같은 족속으로 규정했다. 미국 디스커버리TV에서도 훈족과 그 당시 동북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를 같은 족속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우리 고대 역사서 및 고구려의 무덤벽화에 나타난 말 잘 타고 활 잘 쏘며, 강력한 맥궁을 사용한데서, 그리고 가야인들의 편두, 금속세공기술, 말 안장 및 뒤에 실은 청동솥 등에서 훈족과의 연계를 찾고자 했다.

우리 한반도에는 고대로부터 여러 차례의 부족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수십세기에 걸친 고아시아계의 이동, 예맥족의 이동, 부여고구려계의 이동 등 다양할 수 있겠다. 이중 이색적인 것은 신라가야지역의 무덤 속 부장품 등에 나타난 바와 같이 멀리 유럽으로 떠나간 훈족과의 유사성과 교류의 흔적 내지 이들 일파의 한반도 이동의 흔적이다.

한국인은 중국계가 아니다. 한국인은 북방유목민으로서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훈족일파를 수용한 신라가야계, 그리고 이웃사촌이었던 부여고구려계가 주축이 되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 수 천년 정체성을 보이며 살아왔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우경화추세 속에서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더욱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인류역사학자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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