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규 정
바탕이나 채색이 아니라
깊이다
깊이로 외친다
꺼내줘
아니 잠시만 바라봐줘
담쟁이넝쿨에 가려져
지나고, 또 지나쳐도 좋을
구멍도 그림이야
바람이 불 땐
끄륵 끄끄륵,
지금 한창 구멍 찬 벽 속의 계절이라고
네가 운다
오래된 벽화는 바탕이나 채색이 아니라 깊이라고 말하는 시안이 깊다. 깊이는 시간의 깊이고 길이고 밀도다. 벽에 스치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 구멍이 생기고 긁히고 일부가 쪼개져 없어져 버린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벽화의 일부분이다. 담쟁이 넝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벽화에 스민 시간의 깊이는 푸르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인생. 비록 병들고 모양 없이 늙어가는 어르신네가 푸르른 청춘들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벽화가 아닐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