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권위와 엄숙주의를 엿먹인 말춤

등록일 2012-10-29 21:30 게재일 2012-10-29 23면
스크랩버튼
▲ 이경우 편집국장

그날 밤 정말 갈 데까지 갔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는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 커피가 식기 전에 원 샷 때리는 남자도 심장이 터져 버렸다.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는 머리를 풀었고 점잖아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사내는 완전 미쳐 버렸다. 이순을 바라보는 어떤 고교 동창생들의 모임에서였다.

흥이 오른 선남선녀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앞에서 구령을 불러가며 이끄는 시범에 따라 일제히 “오빠는 강남 스타일”을 연호하며 말춤을 추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왼발 …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고 달려 나가다가 이내 말채찍을 휘두르기도 하고. 말춤은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대낮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도 이들은 집단 말춤으로 한바탕 축제 분위기를 돋우며 선후배들을 기죽게 만들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5주 연속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다. 1위를 못했다고 아쉬워하지만 그게 어디냐. 대한민국의 국격을, 국민적 자존심을 이만큼 올려 준 싸이에게 더 무슨 부담을 주려는가.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뉴욕 집무실에서 싸이와 말춤을 췄다. 유니세프 홍보대사 싸이가 UN 한국대표부에서 열리는 행사에 앞서 무엄하게도 반 총장에게 말춤을 제안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반 총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첫 번째 한국인”의 지위를 싸이에게 양보했다. 그러면서 명성을 떨치는 한국인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말춤의 인기를 실감케 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말춤일까? 동양권에서 말은 사람에게 충직하고 성실하며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신라의 젊은 화랑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생의 집에 자주 드나들어 어머니 만명 부인을 걱정시켰다. 어느날 말이 술에 취한 유신을 늘 하던 대로 천관의 집에 데려다 놓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관의 집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신은 칼로 말의 목을 베어 버린다.

초나라 항우의 오추마는 해하에서 더는 달릴 수 없게 되자 우미인과 함께 항우의 시로 남았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의 적토마는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로 주었다. 전신이 붉은 털로 뒤덮힌 적토마를 올라타고 청룡도를 꼬나 든 관우의 위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목이 움츠려진다. 그 적토마도 관우가 죽자 풀을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던가.

천고마비의 명마들은 싸이의 말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오버랩된다. 그런가하면 서양의 말은 또 어떤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말의 나라 이야기가 압권이다. 휴이넘이라고 불리는 말은 참으로 지혜롭고 관용적이고 무엇보다 도덕적이다. 상대적으로 야후로 불리는 족속(스위프트는 인간을 야후족으로 비유했다) 은 참으로 야비하고 부도덕하며 비겁하다. 한 마디로 모든 나쁜 기질은 모두 갖춘 족속이 바로 야후다. 인간을 이렇게 야유해도 되나 할 정도로 몹쓸 종족으로, 나쁜 습성을 죄다 발가벗겨 놓았다. 이런 야후에 비하면 말이란 일종의 성스러움 마저 느껴지는 족속이다.

그런 말의 이미지가 강남스타일의 말춤과 어울려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싸이의 말춤이 세계를 휘젓는 것은 말이 가진 신성함에 대한 반역이자 잘난 인간들의 `체` 하는 엄숙주의에 대한 풍자다. 어쨌든 싸이의 말춤이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들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중국의 반체제 작가 아이웨이웨이가 `차오니마 스타일` 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린 것도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을 조롱하는 패러디다. 더 이상 기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시대의 선언이 말춤으로 세상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50여일 남은 올 대선에서도 탈권위의 말춤이 어떤 영향을 발휘할 지 지켜볼 일이다.

페리스코프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