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번호로 전화와 목소리에 속아 현금 입금<br>남편·경찰·은행 공조로 통장거래 중지·범인잡아
지난 17일 오후 3시34분. 집에서 부처님 오신 날에 쓸 연잎을 접던 허모(45·여·포항시 북구 우현동)씨의 핸드폰에 중학생인 작은 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4시 15분에 마치는 딸이 오늘은 일찍 마친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자 청천벽력이 울렸다. “엄마, 이상한 아저씨들이 날 때려”라며 딸이 우는 것이었다. 범인이 납치를 빙자해 미리 녹음된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려 준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전화 속 여자 아이를 딸로 착각한 허씨는 “왜 때려? 빨리 112에 신고해”라며 딸을 달랬다.
그러자 갑자기 “뭐 신고? 네 딸 병신으로 만들고 싶어? 딸을 살리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라”고 비웃는 듯한 말투의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상상이 허씨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방에서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웠고 남자와의 통화는 계속 됐다.
“50대 아줌마가 컴퓨터를 어떻게 하겠어요. 카드도 남편이 막아놨어요”라며 안절부절못하는 아내를 본 남편은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남편은 딸이 무사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곧장 학교로 뛰었다. 그 와중에 112에 신고를 하고 은행에 전화해 통장 거래를 중지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전화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같은 시각, 허씨와 남자의 통화는 이어졌다.
남자는 “애는 괜찮으니 딸을 살리고 싶으면 20분 안에 950만원을 입금해라. 전화가 끊어지면 안 되니까 계단으로 내려가고 휴대전화는 주머니에 넣고 은행 앞에서 받아라”며 윽박을 질렀다.
혹시나 딸이 다칠까봐 허씨는 택시를 타고 정기예금을 위해 찾아 놓은 현금을 은행에서 남자가 알려준 계좌로 입금했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허씨를 가까이서 지켜보기라도 하듯 “학교 앞으로 와라. 무슨 색 가방을 메고 있느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숨어 있어라”고 했다.
이때, 허씨의 휴대전화에 1588-****이라는 번호가 떴다. 국민은행 본점 담당자라며 “이상한 사람이 송금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경찰에 신고하고 지급 정지를 내려야 한다”는 말에 허씨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는 남편과 경찰이 있었고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사이 낯선 남자와의 통화는 끊어졌다. 허씨가 입금을 했지만 다행히 지급정지해서 돈은 인출되지 않았다.
허씨는 일을 당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950만원이라는 거금을 순식간에 날린 건 둘째 치고 딸을 어떻게 할 것만 같은 불안함에 어처구니없이 농락당한 수치심이 허씨의 가슴을 짓눌렀다.
허씨는 “불과 며칠 전에 여성문화회관에서 보이스피싱 교육을 듣는 가 하면 남편에게서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었다.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당해보니…”라며 가슴을 쓸었다.
한편, 이날 서울에서는 남자에게 계좌를 양도해 준 이모(25·여)씨가 돈을 찾기 위해 서울 한남동 은행에서 경찰에 붙잡혔으며 경찰은 이씨와 허씨에게 전화를 건 남자와의 공범 관계 등을 수사하고 있다.
/이혜영기자